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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박국의 두 번째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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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3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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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합 1:12~2:1


현재 처한 상황이 너무 감당하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더구나 왜 이런 일에 벌어졌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 누구에게 하소연하거나 좀 따져보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하박국도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하박국이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그가 하나님의 계획과 의도를 온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난주에 소개해드린 대로 하박국서는 주전 7세기 말에 유다에서 선지자로 활동했던 하박국이 하나님께 던진 질문들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들로 엮인 책입니다. 하박국은 다른 선지자들에게서 보이는 것처럼 하나님께로부터 일방적으로 계시를 받아 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마음을 괴롭히고 있는 다양한 신앙적, 실존적 문제들에 관해 하나님께 감히 질문하고 그분으로부터 성실한 응답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하박국서는 오늘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 면에서 귀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그 이유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형성했던 사회 전반적인 죄악상이나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사회 현상이 동일하고, 그 시대를 변화시키기 위해 역사하셨던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강포와 죄악, 패역, 겁탈, 변론과 분쟁 등 죄악을 범하는 가운데 나라가 극도로 쇠퇴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하나님 앞에 질문을 던졌습니다. ‘왜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악하게 살아가는 것을 허용하셔서 이렇게 의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게 만드시느냐’(1:2~4)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유다의 악한 사람들을 전쟁에 능한 갈대아 사람들에게 붙여서 그들로 하여금 유다 백성을 심판하게 만들었다’(1:5~11)고 대답하셨으나, 하박국은 그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방식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기에 하박국이 하나님 앞에 다시 질문을 던집니다. 본문의 순서로는 하나님의 대답 이후에 두 번째 질문이 바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첫 번째 질문을 하나님께 드리고 나서 몇 년이 지난 후에 또 다른 질문을 드렸습니다. 그렇기에 처음 질문 때와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첫 번째 질문이 불평에 가까운 질문이었다면, 두 번째 질문은 ‘바벨론이 이렇게 강해져서 여러 나라를 무자비하게 멸망시키는 것이 옳습니까’라고 탄식합니다. 유다 왕국의 국운이 기울면서 백성의 삶이 피폐해지고 의인들이 고난을 받는 상황을 보며 절망 어린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묻고 응답을 받는 과정을 통해 하박국은 좁은 신앙관이 바뀌고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보다 철저하게 믿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은 누구신지, 우리는 그 하나님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지고 섬겨야 하는지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심판의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1:12)
12절은 하박국의 수사적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이 질문은 하나님의 대답을 기대하는 의문문이 아니라 강한 긍정을 나타내는 부정 의문문입니다. 하나님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우리에게 하나님으로 계신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에 대해서 회의를 가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신을 가지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12절에 여호와에 대한 부름이 다섯 번이나 나옵니다. 그것은 각각 ‘여호와’(2번),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이’, ‘반석’입니다. 이와 같은 명칭들에는 여호와의 속성에 대한 선지자의 신뢰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이’는 ‘나의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언약적 관계를 나타내는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출 6:7상)라는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반석’이란 말에는 여호와께 대한 절대적 신뢰, 즉 하나님께로 피하여 안전함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라는 고백에는 바벨론의 침략이 확정된 상황 속에서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을 남겨 두실 것에 대한 확신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과거 족장들에게 하신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박국의 탄식은 하나님께 대해 단순히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깊은 신뢰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가진 자만이 하나님께 탄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버린 자는 탄식도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탄식은 더 강조된 다른 형태의 간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주께서 경계하기 위하여 그들을 세우셨나이다”하박국은 바벨론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심판 계획을 철저히 인정하는 겸손한 모습과 동시에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의 약속을 취소하지 않으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믿음을 보여주며 이스라엘의 궁극적 구원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악한 자들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1:13~17)
하박국은 하나님께 두 번째 질문을 하는데 먼저 하나님의 성품을 언급합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여기서 ‘눈’은 전인격을 대표하는 단어로써 하나님 그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정결하심은 악과 결코 병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악을 간과하실 수 없으시다면 어떻게 악인이 의로운 사람을 학대하는 것을 허락하실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인간이 보기에 자신은 언제나 선한 것 같고, 자기가 당하는 고난은 불의하기만 합니다. 악인이 더 형통하고 바르게 사는 사람이 손해 보는 일을 자꾸 보게 되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떠나기까지 합니다. 하박국은 악인(바벨론)이 더 의로운 사람(유다)을 삼키는 것이 부당하다고 주장합니다. 하박국의 탄식과 유사한 외침을 시편의 탄식시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일례로 시편 73편에서 시인은 악인이 의로운 자들을 학대하고 번성하는 현실을 고발합니다.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시 73:3~5). 하박국은 하나님이 유다를 징벌하시려면 유다 백성보다 더 의로운 백성을 도구로 사용하셔야 마땅하다고 항변합니다. 하박국은 의로운 자를 삼키는 악인을 괴물에 비유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삼킨다’는 동사는 ‘용’(렘 51:34)이나 ‘큰 물고기’(욘 1:17), 즉 바다 괴물에 사용되던 말입니다. 따라서 하박국은 바벨론이 유다를 삼키는 것을, 괴물이나 스올이 모든 것을 삼켜 죽음으로 이끄는 것에 비유합니다. 바벨론의 잔악성과 무서움이 ‘삼킨다’는 동사에서 생생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의 악행이 14절에서 구체적으로 서술됩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을 바다의 고기 같게 하시며 다스리는 자 없는 벌레 같게 하시나이까?”‘다스리는 자가 없다’는 말은 이리저리 목표 없이 떼 지어 몰려다니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방향 감각 없이 떼를 지어 헤매다가 잡아먹힌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스리는 자’는 유다 백성들에게 왕 되신 여호와를 가리키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 시대의 영광과 권세는 기억 속에 있을 뿐, 현재의 유다 백성은 바벨론에게 삼킴을 당하는 자리로 내몰렸음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을 그물로 바다의 물고기를 잡아 올리는 어부에 비유하는 반면에, 유다 백성은 낚시 바늘이나 그물에 걸려서 죽음을 기다리는 물고기와 같다고 합니다. 비슷한 비유가 예레미야서에서도 발견됩니다. “보라 내가 많은 어부를 불러다가 그들을 낚게 하며”(렘 16:16). 하나님이 유다를 심판하시고자 유다 백성을 낚을 갈대아 사람들을 유다 땅으로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벨론 사람들은 마치 어부들이 물고기를 잡고 기뻐하듯이 유다 사람들을 잡고서 기뻐하는 잔인한 사람들입니다. 개역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16절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란 말속에는 바벨론이 사람들을 고기처럼 ‘어망에 다 모아 놓고’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그물에 제사를 드리고, 어망에 분향을 합니다. 제사와 분향은 특히 호세아서나 예레미야서에서 바알에게 드리는 제사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그물과 어망을 신격화합니다. 다른 민족들을 잔악하게 정복하고 탈취한 결과 바벨론은 막강한 군사력으로 인해 많은 소유를 얻게 되고 기름진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군사력을 신처럼 여기며 그물(무기)에게 제사를 드렸습니다.

17절의 의문문은 하박국의 탄식을 절정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제까지 잠잠하며 그들의 포악을 간과하시겠냐고 따져 묻고 있습니다. 하박국이 탄식을 합니다. 물론 그의 탄식 속에 ‘우리는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확신은 여전히 담겨 있습니다. 세상은 온통 힘과 불의가 지배하는 곳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대로 두시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즉각 개입하셔서 악을 심판하신다면, 그 대상에 자신이 포함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곤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은혜로 대속을 얻은 것이지, 우리의 공로나 선함으로 얻은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다리는 자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2:1)
하박국은 탄식할 수밖에 없는 이 모순,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의 상황에 대해 해결책을 알려 달라고 하나님께 탄원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전에 자신을 먼저 준비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리고자 높은 곳, 멀리 볼 수 있는 곳으로 올라갑니다.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본문을 직역하면 ‘내가 책망을 받을 때 무엇이라고 대답할까’가 됩니다. 하박국이 하나님께 두 번째로 질문한 것에 대해 하나님이 책망하신다면 ‘무엇이라 대답할 것인지’생각해 보려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다리고 준비된 자에게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은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고 준비된 자들에게 찾아오십니다.

우리의 자세
- 하나님의 주권과 계획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하박국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온갖 악을 자행하는 갈대아 사람을 통해 유다 백성을 심판하신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악인이 정의롭고 거룩한 하나님의 제재를 받지 않고 번성할 수 있느냐는 질문으로 이어졌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리시며 그분의 뜻을 성취하십니다. 하나님은 악한 자들까지도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악한 자들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무언가를 행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악한 자들의 득세와 형통을 보면서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자기보다 더 불의한 사람이 자기를 해롭게 하거나 처벌받지 않을 때 참을 수 없어 합니다. 또는 비슷한 죄를 지은 사람들이 많은데 자기만 벌을 받게 되면 불쾌해하며, 소위 재수가 없어서 자기만 당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토기가 토기장이에게 가져야 할 마땅한 자세입니다.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이와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또는 네가 만든 것이 그는 손이 없다 말할 수 있겠느냐”(사 45:9). 이 세상이 아무리 불의해도 하나님의 뜻은 분명히 성취됩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주권과 계획을 철저히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주권과 계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뿐이지 하나님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그분의 뜻을 이뤄 가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찬양하며 그 주권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하박국은 파수꾼처럼 성루에 서서 하나님의 대답을 기다리고 또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비록 그가 아직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공의롭게 다스리시는 방법에 관해 무지했지만, 나름대로 신앙인으로서 지녀야 할 기본자세는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 인내하고 끈기 있게 기다릴 줄 알았다는 점입니다. 인내함의 결과로 오는 것은 하나님의 보상이요 선하신 응답입니다. 성루에 올라가 하나님의 계시를 기다리는 하박국의 모습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일을 주관하는 주권자시요, 자신의 정하신 때에 정하신 방법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자유자이시라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부족한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방식에 따라 우리가 원하는 때에 활동하시도록 강요하거나 설득한다고 하나님의 마음을 바꿀 수 없습니다. 세상만사에 관해, 그리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관해 제한적으로 이해하는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방식과 원하는 시간에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도록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가장 적합한 때에 가장 선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응답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야도 하박국처럼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 위해 오랜 기간 동안 기다리면서 인내를 배우고 아울러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을 인정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렘 28:10~14). 인내가 부족해 하나님께 탄식을 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신뢰 없는 탄식은 원망이며, 결국 하나님을 떠나게 만듭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리며 어떤 처지에서도 그를 기뻐하고 인내하며 사는 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에게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반드시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기다리는 사람들이며, 기다림의 본질은 소망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간구하며 기대와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해야 합니다
유다 백성에게 요구하신 하나님의 기준은 온전한 마음과 삶과 의가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기준에 크게 미달했습니다. 그들은 의롭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에 합당했습니다. 우리가 크게 착각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의인이라는 착각입니다. 정확히 우리는 은혜를 받은 죄인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은혜로 대속을 얻은 것이지, 우리의 공로나 선함으로 얻은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그래도 저들보다는 낫다’라고 안일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은 장차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3). 하나님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계 20:12) 두 종류의 책이 펴져 있다는 것은 그때가 최종적인 구원과 심판의 자리를 구분하는 때임을 암시합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에 대한 심판은 언급되지 않고 다만 죽은 자들이 ‘자기들의 행위를 따라’심판을 받는다는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심판의 대상은 불신자들이라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죽은 자들의 행위가 기록되어 있는 ‘책들’은 생명책과 대조되어 심판의 근거를 제공합니다. 이 땅에서 행한 부끄러웠던 일들, 죄악된 행동들,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은밀한 일들까지도 낱낱이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삶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부끄러울 것이 없도록 살아가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권위 아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본분은 어떻게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아갈 것인지 묵상하고 행해야 합니다.

나가면서
하나님의 첫 번째 답변을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었던 하박국은 ‘어찌 유다 백성보다 더 악한 바벨론 사람들을 통해 유다 백성들을 심판하다고 하십니까’하면서 또 다른 질문을 했습니다. 아무리 유다의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살았어도 그들이 이방 신들을 섬기는 갈대아 사람 즉 바벨론 사람들보다는 도덕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아버지에게 무엇을 해달라고 떼쓰며 따질 수 있는 것은 아버지를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박국도 하나님을 신뢰하였기에 이런 탄식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하박국의 탄식은 단순히 불평만 늘어놓는 원망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그 속에는 하나님께 대한 깊은 신뢰가 깔려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께 따지는 듯한 질문을 던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는 탄식은 단순한 원망이 되지만, 깊은 신뢰 속에서 드리는 탄식은 간절한 기도가 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감추지 않고 무슨 말이든지 하나님께 쏟아 놓을 수 있습니다. 욥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친히 다스리시며, 그들에게 그분이 뜻을 알려 주십니다.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은 양을 푸른 풀밭과 안전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또한 선한 왕이신 하나님은 백성에게 그분의 뜻을 알려 주십니다. 기대한 것과 다른 일들이 일어날 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성경을 통해 그분의 뜻을 알려 주십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알고자 엎드리는 백성을 멸시하지 않으시고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다스리십니다. 앞으로도 영원토록 다스리실 것입니다. 영원토록 이어질 그분의 공의로운 다스리심에 감사하며 찬양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