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까지리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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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7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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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종교 개혁주일입니다. 특히 금년은 종교개혁 발생 507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개신교를 가리켜 protestant라고 부릅니다. ‘저항자’라는 뜻입니다. 중세 카톨릭의 부패와 불의에 항거하여 개혁자들이 일어섰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중세 카톨릭은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한 진리를 왜곡하여 면죄부를 강매하고, 교황 무오설을 주장하고, 성직을 매매하는 등 극심한 타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뜻이 있는 성도들을 중심으로 개혁 운동이 조금씩 일어나다가 1517년 10월 31일 수도사 마르틴 루터가 독일 북부에 있는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로마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는 개 논제’를 붙임으로 본격적인 개혁의 불길이 일어났습니다.
종교 개혁의 5개 신조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라틴어로 ‘Sola’인데, 그 뜻은 “홀로, 오직”입니다.
Sola Scriptura(오직 성경): 성경만이 유일한 영적 권위의 모체입니다.
Sola Christus(오직 예수): 예수님 외에 다른 것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Sola Fide(오직 믿음): 종교개혁운동의 핵심 주제로 믿음으로만 구원받습니다.
Sola Gratia(오직 은혜):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지, 인간의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 영광): 신자는 하나님 외에 다른 존재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개혁자들의 맥을 잇는다고 자부하는 현재 개신교 교회의 실상이 어떠한가요? 종교화, 의식화, 세속화되면서 현대 교회가 알게 모르게 500여 년 전의 중세 카톨릭 교회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개신교 교회가 어느 때보다 의미 있게 되새기고 기념해야 할 날이 종교개혁주일입니다. 한때 부흥 성장했던 유럽 교회들이 문을 닫거나 모스크로 바뀌거나 디스코텍으로 팔려가는 것을 보신다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느끼실까요? 미국도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숫자가 점점 줄면서 더 이상 기독교 국가라 말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성장이 정체된 현실에서 전에는 교회에 다녔으나 이제는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점차 증가하는 추세에 있습니다. 이민교회는 다른가요? 종교개혁은 부패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왜곡된 교리를 겨냥한 것이지만 본질은 신앙과 영성의 개혁입니다. 종교개혁 운동은 중세 카톨릭 교회가 성경에서 떠나 율법주의와 외식적 생활에 빠져 있었을 때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시작된 회복운동입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하다는 개혁자들의 주장은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리 모두 종교개혁의 정신을 되새기고 신앙의 중심을 바로 잡아야합니다.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면서 앞으로 한 달 동안 하박국서를 함께 살펴보며 각자의 신앙여정 속에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고 그분만을 의지하고 그분과 동행하면서 하나님 보시기에 의미 있는 많은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선지서는 대체적으로 선지자가 여호와의 계시를 받아 백성들에게 말씀을 선포하는 형식으로 기록되었으나, 하박국서는 하나님께 드리는 선지자의 질문과 그 질문에 대한 여호와의 답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의롭고 공평을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에 어찌하여 악인이 성행하며, 어찌하여 의인들은 이들로부터 착취를 당하며 괴로워해야 한단 말인가? 라는 질문으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문제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대화를 원했습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때로는 하박국 선지자가 욥에 비교되기도 합니다. 하박국은 공평과 의를 지향하거나 전제하는 사회의 가장 기본적이고 실존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의심하여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신뢰하고 있기에 이러한 사실에 상충되는 듯한 현실이 빚어내는 혼돈에 대해 진솔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날이 올 때까지 우리는 과거에 선포된 ‘계시’와 미래에 있을 ‘성취’의 ‘사이’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사이’에서 사는 동안 믿음과 현실은 항상 대립한다는 것이 하박국의 신학적 통찰입니다. 그러므로 하박국서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그‘사이’를 살아가고 있는 주의 모든 백성들을 위한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과 현실이 빚어내는 갈등에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하박국서는 백성들을 향한 직접적 말씀 선포가 아니라, 선지자가 현실에서 부딪히는 신앙 문제를 하나님과 문답 형식으로 진행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대부분의 선지자들이 ‘그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도전’으로부터 실마리를 풀어가고 있음에 비해 하박국서는 ‘선지자의 하나님을 향한 도전’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표제(1절)
이 책의 표제라 할 수 있는 1절은 저자에 대해 이름 외에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히브리 성경에서 하박국서의 첫 단어인 히브리어‘마사’는 ‘신탁’이라는 뜻과 함께 ‘부담, 짐’이란 뜻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받았다’는 말은 원어로 ‘본다’는 말입니다. 이는 마음의 눈으로 보았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박국서는 하나님이 하박국 선지자에게 직접 보여 주신 계시의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박국이 묵시를 본 때는 언제입니까? 언제 받았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추정이 가능합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유다를 처음으로 공격한 때는 주전 605년이므로 그 전에 쓴 것으로 보입니다. 여호야김이 유다를 통치하고 있던 때였을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 요시야 왕과는 달리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강포로 통치하였습니다. 하박국은 예레미야, 나훔과 동시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하박국의 탄원 기도(2~4절)
2절은 ‘여호와여 내가 주님께 얼마나 오랫동안 부르짖어야 합니까’라는 탄원으로 시작합니다. 하박국이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의 탄원을 계속해서 듣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하박국은 ‘어느 때까지리이까’라는 말로 자신의 애타는 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언제까지입니까?’라는 말로 서두를 시작하는 경우는 시편의 탄식시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언제까지 나의 영혼이 아픔을 견디어야 합니까? 언제까지 고통을 받으며 괴로워하여야 합니까?”(시 13:2). 2절 하반절은 하박국이 당시의 사회에 만연해 있는 불의를 하나님께 고발했음을 알려 줍니다. 하박국이 ‘폭력이요’하고 외치며 구원을 호소하여도 하나님은 아무런 반응이 없으시다고 합니다.
하박국은 3절에서 더 자세하게 하나님께 아룁니다. ‘왜’, 즉 ‘어찌하여’라는 의문 부사를 통해 죄악의 심각함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보게 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미완료형 시제로 되어 있으니 계속적인 행위를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로 하여금 계속해서 죄악과 패역을 보게 하십니까?’하는 그의 호소는 하나님께서 개입하지 않으시는 것에 대한 답답함이 담겨 있습니다. 유다 공동체에 억압과 폭력이 난무하며, 다툼과 분쟁으로 일그러져 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율법이 무시되고 공동체 안에 정의가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있다고 탄식합니다. 4절 하반절에서는 그 이유를 말합니다. 악인들이 의인들을 에워쌌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무시되고 정의가 실현되지 않으면 공동체 안에 악이 번성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박국의 탄원에 언급되는 ‘폭력’을 행하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또한 4절에 나오는 악인들은 누구입니까? 갈대아인들은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일 뿐입니다. 율법이 해이해지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로에게 악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22:13~19을 보면, 공평과 정의를 행했던 요시야와 달리 불의와 압제를 행한 여호야김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가혹한 심판을 예고하십니다. 왕의 죽음을 애도하는 신하나 백성들이 없을 것이요, 그의 시체가 매장되지 않고 버려지는 모욕을 당한다고 합니다.
지도자들이 악에 물들면 어떻게 됩니까? 악을 판단할 수 없게 될 뿐 아니라 오히려 악을 앞장서서 행하게 됩니다. 의인이 고난 받을 때 방백들에게 나아가면 그들의 구부러진 판단 때문에 오히려 더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하박국은 이렇게 비참한 상황에서 침묵하시는 하나님의 처사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유다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나라가 아닙니까? 하나님의 율법이 이 나라의 법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찌 악이 이기게 되고 정의는 굽게 되었습니까? 2절에서 사용된 ‘어느 때까지’라는 말은 전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구할 때, 안식일에는 구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혹시나 하여 만나를 구하러 나갔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출 16: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그들이 정탐꾼들의 보고를 듣고 불신앙을 표현했을 때도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민 14:11)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의 죄를 언제나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하박국의 탄원은 하나님의 마음을 담아 믿음 안에서 괴로움을 하나님께 쏟아 붓는 기도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첫 번째 답변(5~6절)
하박국의 탄원에 대해 하나님이 드디어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보라’로 시작합니다. “나라들을 보라. 그리고 관찰하여라. 심히 놀라라.”개역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5절 하반절은 접속사 ‘왜냐하면’이 있습니다. 놀라게 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들의 생전에 하나님이 한 가지 일을 행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다 백성들은 그것이 선포되어도 도저히 믿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유다의 악을 제하기 위하여 갈대아 사람들을 일으키신다고 합니다. 갈대아는 곧 바벨론을 가리키는데 그들은 원래 앗수르의 속국이었습니다. 앗수르 제국이 약해진 틈을 타서 주전 626년에 나보폴라살이 바벨론의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그들은 결국 메데와 연합하여 신바벨론 왕조를 세웠고, 주전 612년에 니느웨를 함락시켰습니다. 그리고 주전 605년에 갈그미스 전투에서 애굽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그들은 불과 20년 만에 고대 근동의 패권을 쥐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빨리 일어난 만큼 빨리 망했습니다. 그들은 주전 539년에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에게 멸망당했습니다. 대제국이 70년밖에 가지 못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공의를 세우는 도구로 갈대아를 일으키셨다는 말을 실감하게 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땅이 아닌 곳을 점령할 것입니다. 이는 출애굽 당시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이 짓지 아니한 성읍, 파지 아니한 우물, 심지 아니한 포도원을 얻게 하십니다(신 6:10~11). 바벨론이 옛날 이스라엘 족속이 했던 역할을 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답변을 보면 하나님은 하박국이 탄식한 대로 침묵하고 계셨던 것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일하시려고 기다리셨습니다.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은 이제 고대 근동의 역사 속에서 큰일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메시지를 들었을 때 아무도 그 사실을 믿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이십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사람들이 깜짝 놀랄만한 일을 펼쳐 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복과 저주에 대해서 미리 알려 주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선택하고 준비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십니다. 본문에서도 하나님은 바벨론이라는 나라가 등장할 것과 그 나라를 통해 유다를 멸망시킬 것을 예고하십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이 경고를 아예 듣지 않거나 자신의 방식대로 반응합니다. 이 또한 하나님이 이미 알고 계신 인간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이유는 그분의 백성을 심판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심판을 피할 길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심판의 도구인 갈대아 사람들(7~11절)
이 단락에서는 갈대아 사람들의 성향과 그들의 군사력에 대해 시각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본성은 사납고 호전적입니다. 그들은 기동력이 매우 뛰어나고, 그들의 군마는 표범보다 빠르다고 합니다. 보통 저녁에 사냥을 하러 나오는 이리에 비유한 것은 하루 종일 굶다가 먹이를 대할 때의 격렬함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들의 기마병은 먹잇감을 정하고 날아드는 독수리와 같다고 합니다. 일단 먹잇감을 찾으면 빠르게 날아가 놓치지 않고 낚아챕니다. 이런 묘사는 신명기에도 등장합니다. “곧 여호와께서 멀리 땅 끝에서 한 민족을 독수리가 날아오는 것 같이 너를 치러 오게 하시리니”(신 28:49). 하박국은 유다의 ‘폭력’때문에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백성을 심판하는 도구인 바벨론의 특징이 바로 ‘폭력’입니다. 그들이 폭력을 행하는 유다 백성에게 폭력을 행하려고 옵니다.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의 씨가 바다의 모래와 같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와 같이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잡는다고 합니다. 갈대아 사람은 열방의 왕들을 멸시하며, 귀족들을 비웃을 것입니다. 견고한 성도 비웃습니다. 흙을 쌓아서 성 높이까지 오르막길을 만들어 쉽게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하박국의 탄식에 대한 하나님의 첫 번째 응답은 바벨론이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갈대아 사람들은 자기들의 힘을 신으로 믿고 온 땅을 바람처럼 휩쓸고 지나가며 악을 행할 것입니다. 힘없는 민족을 무참히 짓밟습니다. 악인들 그리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 힘을 자기들의 신(구원)으로 삼는 것입니다. 물론 힘이 강할 때, 그들은 세상을 호령합니다. 그리고 해가 지지 않는 나라와 제국을 건설하려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힘, 그들이 의지하는 신의 힘은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힘과 나라는 곧 다른 이들로 대체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없는 자들의 세력이 갑자기 커지는 것에 대해 놀라면 안 됩니다.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이 틀림없이 그들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하나님은 유다의 불의에 대해 결코 방관하거나 침묵하고 계신 것이 아니며, 바벨론을 심판의 도구로 삼으셔서 열방 가운데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자세
- 자신의 죄악됨을 깨달아야 합니다
종합검진을 받으러 갔다가 뜻밖에 암과 같이 심각한 것이 발견되어 몹시 놀라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박국이 원한 것은 개혁과 치유였지만, 하나님은 갈대아 사람, 곧 바벨론을 들어 유다를 멸할 계획을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하박국은 깜짝 놀랐습니다. 하나님이 묘사하신 갈대아 사람들은 호전적인 자들로, 강한 군대를 가지고 성읍들을 정복하는 자들입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자기들의 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당시 유다는 이런 극악한 무리를 통해 철저히 파괴되는 수준의 심판을 당하지 않고서는 안 될 수준까지 부패해 있었습니다. 이처럼 현재 나의 문제, 가족의 문제, 교회의 문제, 사회의 문제가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자기가 지금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큰 죄를 범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내 눈에 작게 보이는 것을 하나님도 작게 여기실 것이라고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에 우리의 삶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하박국이 하나님께 원망을 쏟아 놓는 이유는 하나님의 침묵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비슷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곤 합니다. ‘왜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습니까? 왜 속히 고쳐주시지 않습니까? 왜 나만 이런 어려움을 겪게 하십니까? 나는 정말로 힘들고 괴로운데 나를 사랑하신다는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방관하지도, 침묵하지도 않으십니다. 믿음은 기다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롬 4:20) 하나님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과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할 것은 믿음으로 참고 주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들에게 그들이 생각한 이상의 것으로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악인이 활개를 치고 그로 인해 세상이 악으로 가득 채워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하나님이 귀가 들리지 않으시는 것처럼, 세상에 무관심하시며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고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방관하고 계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세상을 다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때가 되면 이 세상의 모든 악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날이 언제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날이 속히 임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약 2천 년 전에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 땅에 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날에 행해질 하나님의 심판은 무시무시할 것입니다. 표범보다 빠르게 다가와 독수리처럼 악인들을 낚아채 지옥으로 던져 버릴 하나님의 심판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날에는 사람들이 쌓은 모든 것들이 다 무너질 것이며, 모래같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그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 길이 바로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요 14:6). 그 길이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만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해 지옥이 아닌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또한 이것을 모르는 수많은 사람에게 이 사실을 꼭 전해주어야 합니다.
나가면서
신앙인이라면 하나님께 대하여 의문을 품거나 회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믿음으로 견디고 즉각적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이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 항변이 담긴 탄원을 하고 있는 하박국 선지자의 모습을 불신앙의 행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박국이 하나님께 그런 질문을 던진 후 어떠한 과정으로 진행되어 나가서 결국 어떤 결론에 이르렀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박국서에서 신앙이란 한 번도 의심을 품지 않거나 회의에 빠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의심을 품고 회의에 빠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끝까지 붙들면서 마침내 옳은 결론에 이르는 것임을 보여 줍니다. 하박국은 현실 생활에서 하나님의 처사에 대하여 자신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에 부딪혔을 때 그 문제를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다가 다른 길로 가버리는(하나님을 떠나 버리든지 하는) 불신앙의 길을 택하지 않고, 하나님께 들고 나가서 해결을 받는 신앙의 길을 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과의 사이에 탄원과 대답의 과정을 반복적으로 거치면서 하나님의 역사 진행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얻게 되고 마침내 자신의 삶에 대해여도 새로운 결단을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우리가 기대한 것과 다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방법대로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 방법이 우리에게 가장 좋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본문이 펼쳐 보이는 삶의 현장을 생생하게 묵상하며 그것으로부터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를 깨달아 오늘의 삶의 현장에 적용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당장은 이해할 수 없더라도 나중에 하나님의 지혜에 대하여 찬송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