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가정생활과 직장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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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9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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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방문하면 아파트들이 도시나 시골 구별 없이 굉장히 많이 세워진 것을 보게 됩니다. 1990년대 초반까지 아파트 이름에는 단순히 건설사 이름을 붙였습니다. 현대, 삼성, 주공, 신동아 등등. 그런데 2000년대에 들어서 건설된 아파트들의 이름이 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전국에서 이름이 가장 긴 아파트는 파주시에 위치한 ‘가람마을10단지동양엔파트월드메르디앙’으로 무려 19자에 달합니다. 그 외에도 ‘대원칸타빌더테라스’, ‘하이파크시티신동아파밀리에’등등 제대로 발음하기 힘든 아파트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이름이 길어지고 발음이 어려워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혹자는 시어머니가 아들 집을 쉽게 찾지 못하도록 며느리들을 위한 배려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아파트 이름이 다시 쉬운 이름으로 바뀌고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름을 어렵게 만들었더니 시어머니가 시누이 손을 잡고 같이 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믿든지 말든지. 이런 이야기는 각박해진 세태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농경시대에는 농사나 목축을 하면서 가족들이 서로 의지하고 함께 일해야만 했기에 경제적 필요에 의하여 조부모, 부모, 자식 심지어 일가친척들까지 모여 살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함께 살다보니 자연 가족 간의 위계질서가 필요하였고, 윗사람에 대한 절대 순종을 요구했습니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뿐 아니라 할아버지와 손주, 친척과의 다양한 관계에서 오늘날 젊은이들이 배울 수 없는 정서적인 안정감, 소속감과 정체성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의 히브리 가정은 종교적 공동체로서 자녀의 신앙을 책임지는 살아 있는 교육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도시화 산업화의 과정에서 현대 가족은 확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전환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성경의 가르침이 21세기에는 별로 쓸모없고 낡은 말씀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고 히브리 기자는 말합니다. 진리는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오늘날의 상황에 그 변하지 않는 진리를 어떻게 적용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대 세계에서 남편은 아내에게, 부모는 자식에게, 주인은 종에게 일방적이고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하였습니다. 요즘도 아내를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 남편들이 적지 않고, 자식들의 의사에 반해 무조건 자기의 주장만을 관철시키려는 부모들이 적지 않고, 종업원들에 대해 갑질을 하는 고용주들이 많은데 바울의 제안은 당시 상당히 파격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바울의 권면이 기존 질서를 전적으로 무시하거나 파괴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물론 가부장 시대에 살면서 자신보다 낮은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거나 유보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5:21) 원리를 남편과 아내뿐 아니라 부모와 자녀, 성전과 종의 관계에도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자녀들에 대한 권면(1~3절)
-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라
신앙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관계입니다. 이웃과의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반영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웃을 자연스럽게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자녀들아’라는 호격으로 자녀들을 향한 권면을 시작합니다. 여기서 자녀들은 단지 어린아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구원을 얻은 모든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특히 ‘주 안에서’라는 표현은 그리스도를 주로 경외하는 자녀들답게 자신들의 부모를 마치 그리스도를 섬기듯이 하라는 것입니다. 자녀들을 향한 권면은 첫째,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에서 ‘복종하라’(submit)는 것은 남편에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아내가 남편에게 자발적으로 자신을 드려 섬기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자식들에게 강제적인 의미가 담긴 ‘순종하라’(obey)를 사용합니다. 비록 6장 4절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하면서 아버지의 권위를 제한하고는 있으나, 아내가 남편을 섬기는 것과 자녀가 부모를 섬기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부르며 순종하는 것과 같이 자녀들도 자기의 부모들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옳기’때문입니다. ‘옳다’로 번역된 단어는 언약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과 질서에 부합한다는 뜻입니다.
전에는 아이들을 많이 낳았지만 요즈음은 보통 하나 많아야 둘을 낳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이가 집에서 우상이 되기 쉽습니다. 교사가 자기 자식을 야단쳤다고 부모가 학교까지 가서 다른 학생들 보는 앞에서 교사를 구타하고 폭언하는 기사가 가끔 보도됩니다. 자기 부모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 자란 아이가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자녀들은 부모가 자기를 섬겨야 하는 존재로 착각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부모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아이들,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쉽게 좌절하고 포기하는 아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로마서 1:28~30절에 보면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자들의 죄들이 나열되는데 그중에 “부모를 거역하는 자“라는 언급이 나옵니다. 디모데 후서 3:2에서 말세에 나타나는 현상들이 언급되는데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부모를 거역”한다고 합니다.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 것은 마땅한 도리입니다. 부모의 권위가 인정되는 가정이 건전한 가정이요 그런 가정으로 이루어진 사회가 건전한 사회입니다.
-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십계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십계명의 첫 네 계명은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이고, 나머지 여섯 계명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이웃 사랑의 실천은 가족으로부터 시작되는데 그 첫 번째가 부모를 공경하는 것입니다. 십계명 중 5번째 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입니다. 이 명령은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되는 option이 아니라 반드시 지켜야 하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부모를 공경할 때 누리게 되는 복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잘되는 것과 장수의 복입니다. 이 말은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자들은 언제나 하는 일마다 잘되고 반드시 오래 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니 그만큼 죄를 짓지 않으며 그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들을 피하게 된다는 것이지, 일찍 죽는 자들은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지 않을 경우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출애굽기 21:17절을 보면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21장을 보면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녀를 타인이 아닌 부모가 끌고 가서 장로들에게 보이고 아들의 악행을 말하면 그것을 보고 듣는 성읍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여 죽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은 주님 다시 오시는 날까지 지켜져야 합니다. 우리말 번역에는 ‘부모’로 되어 있으나 원어를 보면 출애굽기 20:12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고 되어 있고, 레위기 19:3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경외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 여자는 사람 수에 들지 못하였지만 부모를 동등하게 공경하고 동등하게 경외하라고 명령합니다. 출애굽기 20:12의 약속은 원래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누리게 되는 복을 가리켰는데, 바울은 믿는 자들에게 적용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고 합니다. 2계명에도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신다’는 약속은 있지만 그것은 모든 이들에게 적용되는 일반적인 약속인데 반해, 5계명은 부모에게 순종한 자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약속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공경’이라는 말은 ‘높이 평가하다, 가치를 두다’는 뜻을 가집니다. 요한복음 5:23에서 “하나님을 공경하라”할 때 같은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공경하듯이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을 누가 보십니까? 하나님이 보십니다. 부모를 공경하면 하나님이 그 자녀들의 장래를 복되게 하십니다. 부모를 잘 공경하면 그들의 자녀들도 본을 받아 자기들의 부모를 잘 공경하게 됩니다. 물론 부모공경은 부모가 요구하거나 명령한다고 될 성질의 것은 아닙니다. 부모가 먼저 자녀들에게서 공경 받을 만한 신앙과 덕스런 행위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부모에 대하여 존경을 가지는 태도 뿐 아니라 나이가 든 부모를 육신적으로 돌보는 것도 포함됩니다.
마가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 당시에도 의도적으로 부모공경을 피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였고 부모를 욕하는 자는 죽이라고 했는데 유대인들은 ‘고르반’이라는 전통을 만들어 부모를 모시는 책임을 벗어버렸다고 지적합니다. 고르반 제도가 무엇입니까? 자기가 가진 재물은 하나님께 드렸다고 사람들 앞에서 선언합니다. 그러면 고르반으로 지정된 재물을 가지고는 부모를 위해 사용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르반 제도에 함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기는 드리는데 언제 드린다는 기약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재물을 자기 마음대로 쓰다가 죽으면 그만입니다. 즉 고르반은 부모를 위하여 쓰기는 싫으면서도 자기 재물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과시하기 위한 방편으로 만들어낸 제도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명분으로 부모에 대한 의무를 게을리 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말씀을 헛되게 하는 위선자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우리는 부모공경을 예수님으로부터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30세까지 가족을 부양하셨습니다. 그런데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집을 떠나셨습니다. 십자가의 임종을 앞두신 주님은 십자가상에서 요한에게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하셨습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7). 튀르크에를 방문할 때 에베소에 가 보면 요한이 마리아를 모셨던 집이 유적지로 되어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동생들은 아직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았고 그저 육신의 형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누구보다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과 뜻을 잘 알았기에 마리아를 끝까지 잘 섬길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가정이 깨어지고 사회의 전통적인 질서는 무너져갑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 대신에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이 점차로 퍼져 가는 이때에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건전한 가정에서의 질서를 우리부터 회복하며 세상에 본을 보여야 합니다. 자녀들은 그리스도를 경외하며 주 안에서 순종하는 자세를 가지고 부모를 섬겨야 합니다.
종말론적 관점에서 볼 때, 땅에 관한 아브라함 언약은 예수님의 재림 때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로 성취되고, 상속받은 땅에서 장수를 누린다는 약속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부활한 몸으로 영생을 누림으로 성취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기업의 보증이 되신’성령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아들들과 상속자들로 성장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는 약속이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들에게 종말론적으로 성취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모들에 대한 권면(4절)
-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바울은 세 번째 권면을 이번에는 부모에게 합니다. 4절의 ‘아비들’은 문맥 상 부모를 대표하는 차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자녀들의 공경의 대상에 아버지뿐 아니라 어머니도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절대적 권위를 주장하는 것이 당연하던 사회적인 상황에서 바울은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인격적으로 대우하라고 합니다. ‘노엽게 하다’는 ‘분노하게 만들다’는 뜻입니다. 인격 무시, 편애, 비교, 불공평, 폭언, 압박, 수치심 자극 등은 자녀들을 노엽게 하는 행동들입니다. 자녀가 분노함으로 죄에 빠지게 하고 ‘마귀에게 틈을 주는’빌미를 제공하게 됩니다. 아이를 부모의 소유물이 아닌 존엄성을 가진 인간으로 대접해야 한다는 바울의 권면은 당시에 아버지의 권위에 심각하게 도전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부모의 권위보다는 부모로서의 책임을 더 강조합니다. 부모가 지나치게 권위적이거나 독재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녀들로 하여금 분개하고 원망을 일으키게 하는 자세, 말과 행동을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고 무조건 부모의 권위만 내세워 윽박지르기만 한다면 자녀가 당장은 그 앞에서 반응을 보이지 않더라도 그 분노가 상처로 남습니다. 그런 식으로 자란 자녀들은 부모에게서 제대로 사랑을 받아보지 못하였기에 커서도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모릅니다. 부모들이 때로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여 자녀들에게 분노를 일으키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부터 먼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야 하며 노엽게 하기보다 자녀들을 격려하여야 합니다.
-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가 자녀를 바르게 양육하는 것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아주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효도와 자녀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일반 사회에서 말하는 것과 다른 점이 있는데 그것은 ‘주 안에서’순종하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양육은 교회에서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도 실천되어야 합니다. 부모가 먼저 신앙적인 본을 보여야 합니다. 말이나 행실이나 경건의 훈련하는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주어야 하고 또한 그리스도에 대하여 가르쳐야 합니다. 잠언 1:8-9에 보면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 사슬이니라”라고 합니다. 당시에 가정의 제사장은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가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오늘날도 가정의 제사장은 부모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녀들을 가르치고 기도하고 축복할 의무와 특권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녀를 양육하기 위하여 두 가지를 언급합니다. 첫째, ‘주의 교훈과 훈계로’자녀들을 양육하라고 가르칩니다. ‘교훈’은 마땅히 해야 할 것들에 대한 지침과 지침대로 행하게 하는 훈련을 뜻하며, 체벌의 의미도 있습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히 12:6). 올바른 징계와 교훈은 성경적이요 참다운 사랑의 표현이요 자녀들을 바로 세웁니다. 둘째가 훈계인데 주로 말로 타이르면서 잘못된 것을 시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나의 이르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잠 4:20).
종들에 대한 권면(5~8절)
-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라
마지막으로, 바울은 종과 상전의 관계를 다룹니다. 바울이 주인들에 대한 종들의 바른 태도를 교훈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 것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 가운데 종의 신분이었던 성도들이 적지 않았음을 암시해 줍니다. 물론 다른 서신에도 종들을 향한 권면이 기록되었지만(딤전 6:1-2; 딛 2:9-10), 에베소서에는 상전들을 향한 권면과 함께 지시된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바울은 참된 ‘주’이신 그리스도와 사회의 질서에 따라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육체의 상전’을 구분합니다.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고 합니다. 종들은 그리스도께 하듯이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라고 권면합니다. ‘두려워하고 떨며’라는 표현은 성도들이 구원을 이루어 가는 태도를 묘사할 때도 사용됩니다(빌 2:12). ‘성실한 마음’은 한결같고 순전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종들이 해서는 안 되는 행동에 대해 언급합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눈가림만’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눈가림’은 주인이 볼 때에만 열심히 일하는 척하고 맡은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순종하는 동기나 목적이 단지 상전의 환심을 사거나 칭찬과 호의를 받으려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행하는 태도로 상전들에게 순종하라고 합니다. ‘마음으로’의 문자적인 의미는 ‘혼신의 힘으로’입니다. 이 권면이 암시하는 것은 ‘육체의 상전’을 섬기는 종으로 살고 있더라도 참된 상전이신 그리스도의 뜻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주권적 통치 아래 있음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선’은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종도, 자유인도 선한 행위가 있어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칭찬과 상급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상전들에 대한 권면(9절)
- 종들에게 이와 같이 하라(do the same to them)
마지막으로 바울은 상전들에게도 ‘피차 복종’의 원리를 적용하여 종들에게 “이와 같이 하라”고 명합니다. “이와 같이 하라”의 문자적인 의미는 ‘그 동일한 것들을 행하라’라는 것으로 종들을 대하는 주인의 태도와 주인을 대하는 종들의 태도가 같은 원리에 기초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근본 원리는 ‘주께 하듯 하는 것’입니다. 주인들도 종말론적 안목을 갖고 자신의 행위에 따라 상급이 주어진다는 믿음으로 종들을 대해야 합니다. ‘위협을 그치라’는 ‘협박, 공갈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당시에는 종들을 학대하고 구타하는 일들, 겁을 주는 일들, 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일들이 비일비재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병폐를 바로잡기 원했기에 모든 성도들, 즉 종들과 상전들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다는 점과 그분은 행위를 근거로 공평하게 심판하시고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을 상기시킵니다. 상전은 종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주님이 사랑하는 자로 바라보고 대해야 합니다. 바울의 권면을 요즘 상황에 비추어 표현한다면, 직장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은 권력을 남용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 위에는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언제나 기억하고 겸손하게 부하 직원들을 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의 신분에 따라 차별하지 않으시고, 오직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하십니다. 따라서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은 청지기 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진실함과 선의로 아랫사람을 대함으로 자신이 하나님께 속한 자임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러할 때 화목한 노사 관계를 이루고 유지할 수 있습니다.
나가면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5:21의 권면이 어떻게 자녀와 부모 관계, 종과 상전의 관계에서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교훈합니다. 먼저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성품과 질서에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이 옳은 길을 가도록 가르치며 훈련하고, 잘못된 길을 가지 않도록 경고하고 훈계해야 합니다. 종들은 육체적 상전을 대할 때 주께 하듯 순종해야 합니다. 오직 궁극적 상전이 되시는 그리스도께 충성하는 마음을 가질 때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상전들도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의 주인이심과 동시에 종들의 궁극적 주인이심을 기억함으로 종들을 함부로 대하거나 위협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이해나 규율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관계 때문에 서로 존중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믿는 형제들과의 관계에서, 믿지 않는 세상과의 관계에서, 부부 간에, 부모와 자녀 간에, 그리고 상사와 부하 간에, 이 모든 관계들 속에서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음 받은 새사람의 모습을 드러내도록 부름 받았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될 때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섬길 수 있습니다. 성도는 주님과의 관계를 인식하고 모든 인간관계에서 겸손과 섬김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 가운데 가정, 교회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빛을 비추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