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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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1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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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엡 4:25-32


신앙과 삶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삶을 통해 신앙을 드러내야 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드러나는 모습은 그 사람의 영적 상태와 수준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새사람은 그에 걸맞게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4장에서 성도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 것을 권면하면서 17~24절에서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고 하였는데, 본문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성도들이 날마다의 삶 속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야 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도 적당히 둘러대며 태연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분을 참지 못하고 가정이나 직장이나 교회에서 혈기를 부리며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것과 남의 것의 구별이 희미하여 빌려 가면 제대로 갚기를 더디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입으로 사랑을 말하면서도 이웃을 용서하거나 불쌍히 여길 줄 모르고 도리어 멸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옛사람의 근성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성도들에게 세상의 헛된 우상과 옛사람을 버리고 거룩한 새사람을 입으라고 권면한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법에 대해 설명합니다. 특히 감정과 언어, 그리고 행실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은 어떤 신비하고도 황홀한 체험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과의 관계 속에서 의와 거룩함을 실천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을 가리킵니다. 믿음의 공동체를 세우기 위하여 새사람에 걸맞은 삶을 살면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한마음으로 아름답고 건강하게 세워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새사람의 언어생활(25,29절)
바울이 ‘그런즉’으로 말씀을 시작하는 것은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롭게 창조된 새사람을 입으라는 가르침을 근거로 권면하겠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성도의 언어생활과 관련된 지침을 먼저 제시합니다. 이는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인간에게 나타난 현상 중 첫 번째가 ‘언어의 타락’이었기 때문입니다.
-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라(25절)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어야 하는 성도가 가장 먼저 힘써야 할 것이 말의 변화, 즉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면서 상호 신뢰감을 쌓아갈 때 그리스도의 몸이 자라게 됩니다. ‘거짓’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기만, 허위 등 진실하지 못한 행위를 총체적으로 일컫는 단어입니다. 또한 ‘유사한 것’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사용된 ‘거짓’은 얼토당토않은 거짓말을 뜻하기보다는 진실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교묘한 거짓말을 뜻합니다. 거짓의 출처는 사탄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이 아담을 유혹할 때 사용한 것이 바로 거짓말이었습니다. 말은 듣는 이의 생각 속에 들어가 의식 세계를 지배합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서 함께 지체된 사람들이 서로 거짓말을 한다면, 그리스도를 모독하고 다른 지체를 손상시키며, 결국 교회를 훼손시키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 되려면 참된 것을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진실하시기 때문입니다.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에서 ‘이웃’은 동료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바울이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고 말한 이유입니다. 서로에게 진리를 말하되 ‘각각’ 그리고 ‘더불어’ 하라는 것은 모든 성도가 서로를 그렇게 대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다 ...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 더러운 말을 하지 말고 선한 말을 하라(29절)
‘더러운 말’은 말하는 사람의 부패하고 불경건한 상태가 그대로 드러나 성도들과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말을 뜻합니다. 음란한 말, 파괴적인 비판과 저주, 원망과 시비의 말들이 더러운 말입니다. 이런 말들은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의 영혼을 오염시키기에 입 밖에도 내지 말아야 합니다. 반면에 ‘선한 말’은 단지 옳은 말이 아니라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말입니다. ‘선한 말’은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칩니다. 은혜는 교회를 존재하게 하고 자라게 하는 하나님의 선한 의지와 도움을 뜻하는데, 덕을 세우는 선한 말이 은혜의 통로가 됩니다. 성도의 온전한 삶은 말의 온전함에서 시작됩니다. 만약 언어가 성령의 다스림을 받지 못해 거짓되고 거룩하지 못한 말은 자신은 물론 공동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세우며 공동체를 세우는 은혜로운 말을 하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우리의 입술에서 정결과 거룩함이 흘러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너희가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마 12:24-27) 하며 예수님께서 악한 말에 대하여 경고하셨습니다. “혀는 ...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약 3:8). 누추하고 어리석은 말, 음탕한 말을 하지 않고 격려, 위로, 칭찬과 같은 선한 말을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고, 격려를 통하여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덕을 세워야 합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집니다.

마귀에게 틈을 보이지 않는 생활(26~28절)
-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26~27절)
자존심이 강하면 사소한 일에도 화를 냅니다. 분노가 터지면 할말, 하지 않을 말을 가리지 않고 다 쏟아냅니다. 그러기에 화를 잘 내는 사람과 있으면 언제 폭발할지 몰라 함께 있기 거북합니다. 더구나 교회 안의 모임에서 자기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혈기를 부리면 교회에 덕이 되지 못합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을 직역하면 ‘화를 내라 그러나 죄짓지 말라’가 됩니다. 그렇다고 화를 내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분을 내더라도 죄를 짓는 정도까지는 내지 말라’고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분을 내다’라는 말은 ‘화나게 하다’, ‘노엽게 하다’라는 뜻으로 어떤 일로 자극을 받아 흥분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에 대한 거룩한 의분을 보이십니다. 우리도 불의에 대한 거룩한 분노를 내야 하지만 우리 자신이 죄성을 가지고 있는지라 분을 통제하기가 어렵습니다. 아이가 잘못하여 야단을 칠 때 아이가 말대꾸하면 더 화를 나서 나중에는 자기의 감정까지 폭발하기도 합니다. “해가 지도록“이라는 구절은 유대인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 1:5) 유대인에게 해가 지는 때는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입니다. 따라서 그 다음날까지 분노를 버리지 못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알래스카 북쪽이나 노르웨이는 여름동안 밤이 거의 없고 낮이 계속됩니다.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했으니 해가 있을 동안에 분을 품어도 된다거나, 해가 지지 않는 지역에서는 오랫동안 분을 품어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화를 혹시 낼지라도 오래 끌지 말고 가능하면 빨리 풀어버릴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마귀에게 역사할 틈을 주어 더 큰 죄를 짓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공동체가 하나 되는데 지장을 주게 됩니다. 마음의 분노는 이성을 마비시키고 죄에 빠지게 합니다. 신자는 항상 성령을 의지함으로 감정을 다스려야 합니다.

- 도둑질을 하지 말고 선한 일을 하라(28절)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요 12:6). 누구를 두고 한 말입니까? 가룟 유다가 회계를 맡으면서 돈을 빼돌렸고 나중에는 은전 삼십 냥을 받고 예수님을 대제사장 무리에게 넘겨주었으나 양심의 가책을 느껴 그 돈은 써보지도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사도행전 5장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속였다가 부부가 한날에 죽고 말았습니다. 십계명 중에 여덟 번째 계명이 “도둑질하지 말지니라”(출 20:15)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라’는 명령은 도둑질하던 과거 삶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도둑질은 다른 이에게 속한 것을 부당하게 자신의 것으로 취하는 모든 부정행위를 포함합니다. 요즘 상황으로 본다면 단순히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는 것 뿐 아니라 세금을 속이는 것, 주인이 종업원에게 최저 임금만을 주면서 혹사시키는 것, 종업원은 종업원대로 주인의 눈을 속여 적당히 일하고 돈을 빼돌리는 것 등이 포함됩니다. 자기가 가진 권력을 이용하여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긁어모으는 소위 권력형 부정축재도 도둑질에 해당합니다. 세상에는 합법적으로, 지능적으로 남의 것을 강탈하여 자기의 배를 불리려는 자들이 많습니다. 이런 도둑 행위가 난무하는 사회에서는 구성원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됩니다. 사회의 약자들이 세력가의 강탈로 인해 마음에 분노가 쌓이면, 결국 그들은 분노를 분출하고 파괴적인 행동을 할 것입니다. 신자는 자기가 수고한 대가로 살아가는 것을 철칙으로 삼아야 합니다. ‘수고하여’라는 단어는 육체가 피곤할 정도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표현합니다. 이것은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이득을 취하는 ‘도둑질’과 대조됩니다. 바울은 도둑질을 하지 않는 것을 넘어 ‘자기 손으로 수고하라’고 권고하면서, ‘선한 일’에 수고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정당한 직업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해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김용진 목사님이 말라위에서 교정사역을 합니다. 그 사역의 성경적 근거가 바로 에베소서 4:28입니다. 그의 사역의 대상인 감옥에 있는 사람들 상당수가 도둑질 하다가 붙잡혀온 사람들입니다. 전에는 궁핍해서 물건을 훔쳤지만 이제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니 더 이상 훔치는 일은 그만두고 그들 손으로 수고하여 얻은 것으로 이웃에게 선한 일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옥수수를 재배하고 그것을 가루로 빻아 영양제를 넣고 인근 학교에 배달해주었습니다. 전에는 많은 어린이들이 너무 배가 고파 학교에 오지 못했는데 이제는 학교에 와서 식사를 제대로 하게 되었습니다. 그 소문이 퍼져 주변에 있는 많은 초등학교들도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심지어 인근 다른 나라에서도 그와 같은 지원 시스템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이 들어온다고 했습니다. 성도들이 일을 열심히 해야 하는 동기는 개인의 이익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함이요, 빈궁한 자에게 도울 것이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으로 변화되어져가는 과정 속에 남의 것을 불법으로 취하던 자가 땀을 흘리며 수고하여 얻은 것으로 이웃의 궁핍한 자들에게 베풀어 줍니다. 도둑질은 옛사람의 모습입니다. 새사람은 도둑질을 하지 말고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빈궁한 자를 도와야 합니다. 일 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는 것이 새사람의 윤리입니다(살후 3:10). 새사람은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해야 합니다(롬 12:11). 새사람은 남의 것을 훔치는 사람이 아니라 남을 돕는 사람입니다.

성령님이 기뻐하시는 생활(30~32절)
바울은 새사람다운 삶의 모습에 대해 설명하면서 삼위 하나님이 성도에게 이루신 일을 그 근거로 제시합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라 진리를 깨닫게 하고 깨달은 진리대로 살도록 능력을 주십니다(요 14:17, 16:13). 성령은 신자들에게 열매를 맺게 함으로 화평하게 하고 오래참게 하고 절제하게 하십니다(갈 5:22~23). 성령은 또한 죄에 대하여 책망하십니다(요 16:8). 성령은 성결의 영이요(롬 1:4), 믿는 자들을 거룩하게 하십니다(롬 15:16). 그런데 신자가 거짓을 말하고, 분을 내고, 도둑질하고, 더러운 말을 한다면 이는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사야서 말씀을 인용해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사 63:10)고 강력히 경고합니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입니다. ‘근심하게 하다’는 ‘슬프게 하다’는 뜻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불의한 일에 대해 근심하고 슬퍼하시며 때로 분노하십니다. 신자가 성령 안에서 “구원의 날까지 인 치심”을 받아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의 정체성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자녀, 그분의 소유된 백성으로 성령을 근심시키지 않고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바울은 광야의 이스라엘이 모세와 하나님을 대적할 때 취했던 태도들, 즉 성령 하나님을 근심하게 하는 다섯 가지 죄를 버리라고 말합니다. ‘악독’(bitterness)은 격한 분노와 증오심을, ‘노함’(rage)은 분노의 표출을, ‘분냄’(anger)은 강한 적대감을 표시하는 것을, ‘떠드는 것’(shouting)은 분노를 자제하지 못하여 소리를 지르는 것을, ‘비방하는 것’(slander)은 모욕적인 말로 욕하는 것을 뜻합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성도의 교제를 훼손하며, 교회의 하나 됨을 깨뜨립니다. 바울은 이런 모든 행위를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라고 권면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자가 ‘새사람’의 모습을 유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원하지 않는 죄를 범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는 공동체의 하나 됨을 증진시켜야 하기에 바울은 ‘친절, 불쌍히 여김, 용서’ 등 세 가지 덕목의 실천을 당부합니다. ‘친절’은 상대방에 대해 인자한 마음을 갖는 것을 뜻합니다. 인자한 마음은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영접하고 말과 행동으로 친절을 나타냅니다. ‘불쌍히 여김’은 연민의 마음으로 상대방을 긍휼히 여기는 것을 뜻합니다. ‘용서’는 상대방의 과오에 대해 처벌하거나 보복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것처럼 성도는 다른 사람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근거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여 자기 몸을 버리셔서 하나님께 거룩한 희생제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서로에게 친절을 베풀고 불쌍히 여기며 용서할 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든든히 세워져 갑니다.

건강한 언어생활을 해야 합니다
혀의 순기능이 있습니다. 형제를 위로하고 선한 말을 합니다. 반면에 역기능도 있습니다. 많은 경우 교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혀의 역기능 때문입니다. 혀를 잘못 움직여 문제가 생기고 말 때문에 많은 사람이 상처를 입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형제를 헐뜯고 비방하고 무너뜨리는 것은 지옥 불의 역사와 그 원리가 같다고 합니다. 그 기원은 사탄입니다. 함부로 말하는 사람은 사탄의 도구가 되기 쉽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럴 가능성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말의 순기능을 회복하는 길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 말은 자신을 심판하는 잣대가 됩니다. 그 사람이 하는 말보다 그 사람의 상태를 더 잘 나타내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도움 없이는 어느 누구도 자기 혀를 길들일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실 때 우리의 혀는 비로소 하나님을 찬송하고 형제에게 복을 빌고 용서하는 데 사용됩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 성령의 역사가 메마르지 않도록 회개를 통하여 자신을 비우고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위로부터 임하는 성령의 능력으로 채움 받아야 합니다. 혀로 지은 모든 죄를 성령의 불로 깨끗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혀를 어떻게 사용해야 합니까? 성경은 말을 입술의 열매라고 합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잠 18:20). 그런데 하나님은 입술의 열매를 짓는 분이십니다. “입술의 열매를 짓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사 57:19). 하나님은 당신의 귀에 들린 대로 행하십니다. 출애굽 1세대는 열 명의 정탐꾼들의 보고를 듣고 낙심하여 밤새도록 통곡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민 14:2) 그렇게 말한 이유는 사실 살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서 엎드러질 것이라”(민 14:28) 그 결과 출애굽 1세대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욕하는 모든 말을 나 여호와가 들은 줄을 네가 알리로다”(겔 35:12). 그래서 베드로는 권면합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벧전 3:10). 그리스도인은 주 안에서 거듭난 자들입니다. 새로운 방언을 말하는 자들입니다. 성령 충만하게 될 때 하나님의 복된 지식, 행복한 언어를 갖게 됩니다. 그래서 시인은 노래합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 19:14).

야고보 3장에 의하면 혀는 작지만 영향력이 큽니다. 필요하지만 위험합니다. 길들이기 어렵습니다. 이 사실을 항상 기억하며 절제된 언어생활을 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을 자랑하는 말, 감사하는 말, 찬양하는 말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칭찬하는 말, 격려하는 말들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야 합니다.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단련하느니라”(잠 27:21). 칭찬은 사람을 금과 같이 은과 같이 귀한 존재로 만듭니다. 반면에 인생을 황폐케 하는 거짓말, 비방, 멸시, 조롱이 담긴 더러운 말은 피해야 합니다. 악한 마귀가 오늘도 성도들에게 비방과 조롱하는 말들을 하게 합니다. 마귀는 어떻게 해서라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이간시키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간 시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이에 비방하는 말들, 멸시하고 조롱하는 말들을 할 때에는 상대에게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지금 우리 가운데 사탄이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비방이나 멸시하는 말들은 다툼을 일으킵니다. 하나 되어 행복해야 될 사람들이 이런 악한 말들로 인하여 나뉘고 등을 돌리게 됩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하더라도 이런 악한 말은 상처를 줍니다. 그리고 그 상처는 오래 갑니다. 멸시와 조롱은 받고 자란 사람은 부정적인 사고를 갖게 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과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 원망과 불평하는 말은 입 밖에 내서는 안 됩니다. 성숙한 인격이 배어난 언어생활을 통하여 행복한 가정, 행복한 교회를 만들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아 행복한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나가면서
바울은 어떻게 새사람으로 살아야 하는지 구체적 지침을 제시했습니다. 그리스도로 인해 새사람이 된 자는 성령의 능력으로 인해 새로운 삶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삶의 열매는 곧 절제된 감정과 상대를 배려하는 언어생활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물질을 사용하는 방법이나 다른 사람을 대하는 자세를 통해서도 나타납니다.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서로를 세울 수 있는 말을 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교회의 거룩과 연합에 역행하는 일들을 말하고 행함으로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옛사람이 가진 파괴적인 모습들을 모두 버리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친절과 긍휼과 용서를 베푸신 것같이 우리도 서로를 대해야 합니다. 사랑과 은혜를 입었으니 이제는 우리가 바로 사랑과 은혜의 통로가 되어 이 땅에 주님의 사랑을 전하며 주님의 은혜를 나누어야 합니다. 사랑 가운데서 행하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서로의 관계가 원만하게 되어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가 한 몸으로 세워집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을 입는 것이요, 하나님이 부르신 부름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새로운 이스라엘로서 정체성과 거룩함을 지키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하나 되고 성숙하게 자라도록 최선을 다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