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까지 자랄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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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8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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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33회 올림픽이 지난주 폐막되었습니다. 한국 팀이 금메달 5개를 목표로 했는데 13개를 얻어 역대 금메달 최고 성적과 타이를 기록했습니다. 칼, 활, 총과 관련된 종목에서 주로 메달이 나왔기에 한국인은 전투민족이 아니냐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습니다. 저는 올림픽에서 육상 계주를 언제나 즐겨 봅니다. 개인 스피드보다 팀 스피드를 더 중시하는 종목이기 때문입니다. 남자 400m 계주 결승을 보았습니다. 선수 면면으로 보면 미국 계주 팀이 단연 우승후보였는데 exchange zone을 넘어서 바통을 넘겨받았다고 하여 실격 처리되었습니다. 경기 후 안타까워하는 그들의 모습을 카메라가 계속 비춰 주었습니다. 아무리 개개인이 뛰어난 능력을 가져도 팀워크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즉 하나가 되지 않으면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하나 됨을 말하며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시는 것을 힘써 지키라”(4:3)고 당부한 바울은 본문에서 교회의 각 지체에게 은사와 그것을 주신 목적에 관해 말합니다. 각 지체가 맡은 분량에 따라 자신의 기능을 다할 때 교회는 견고히 세워져서 그리스도의 온전한 한 몸을 이루어갑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그 동안의 사역을 돌아볼 기회를 가졌습니다. 좀 더 잘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며 아쉬움을 느끼게 한 적이 있았습니다. 교인들에 대한 양육이 더 잘 되었더라면, 리더 훈련이 더 잘 되었더라면, 교인들을 더 사역의 현장, 선교의 현장으로 이끌었더라면, 교인들과 진솔한 교제를 더 가졌더라면 하는 것들입니다. 그와 더불어 저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도우시고 복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윗의 고백처럼 ‘내 잔이 넘치나이다’하는 말이 절로 나왔습니다. 새 일을 행하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앞으로 누가 교회를 이끌든지 온 교우가 훌륭한 팀워크를 가지고 우리 교회에 주신 비전을 향하여 한 마음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어떻게 하면 성숙한 교회로 나아갈 수 있을지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영적 성숙의 의미
우리가 단지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성숙하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고 이웃과의 관계가 화목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성숙함은 삶의 자세(attitude)와 인격(character)에 따라 결정됩니다. 영적 성숙이란 한 마디로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3:14에 의하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첫 번째 목적은 ‘함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예수님의 모든 것을 보고 배워야 했습니다. 그분의 순종과 겸손을 본받아야 했습니다. 분주한 가운데서도 새벽 한적한 곳에 가셔서 하나님 아버지와 더불어 교제를 나누시는 모습을 본받아야 했습니다. 그분의 오래 참음을 본받아야 했습니다.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본받아야 했습니다. 로마서 8:29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사람들을 택하셔서, 자기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다고 하면서 성도들이 도달해야 할 최종 목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화의 삶을 살 때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와 함께 영화롭게 됩니다.
영적 성숙의 특징
-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히 5:12-13). 히브리서 기자는 어린아이와 젖, 장성한 어른과 단단한 음식의 대조적인 비유를 하며 장성한 어른이 되어 단단한 음식을 먹어야 할 자들이 젖이나 먹는 어린아이 상태에 있다고 안타까워합니다. 신앙의 연수가 오래되었다고 해서 저절로 성숙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알아 가는데 게을리 하면 영적 성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 시간이 걸립니다
세미나 한번 참석한다고 제자훈련 한 단계를 마친다고 바로 성숙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 성숙을 이루는 속성코스는 없습니다. 일생동안 주님을 닮아가는 성화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분이 가르침이 무엇인지 계속 배우면서 실천해야 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1-2) 히브리서 기자는 신앙생활을 경주로 비유합니다. 그것도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장거리 경주입니다. 한때 빨리 달렸다고 그 다음부터 천천히 걸어가도 되는 그런 경주가 아닙니다. 어떤 정해진 분량이 있어 몰아서 달린 후에 그 다음은 달리기를 멈추어도 면류관을 받는 그런 경주가 아닙니다. 과거에 어떻게 달렸든 믿음의 현재에서 여전히 최선을 다해서 달려야 합니다. 그리고 경주하는 것이 항상 즐겁지만은 않습니다. 결승점에 다다를 때까지 고통이 있고 눈물이 있고 갈등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도 벗어버릴 것은 벗어버리고, 힘들어도 인내하며 끝까지 달려야 합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달려야 합니다.
선물을 주신 그리스도(7~10절)
바울은 하나님이 교회의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다’고 선언합니다. ‘은혜’는 보통 죄인들을 구원해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호의를 뜻합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성도들에게 각기 다른 ‘선물’(은사)을 주시는 은혜를 가리킵니다. 은혜가 은사라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내용이 은사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에게 맞는 적절한 은사를 주셨음을 뜻합니다. 바울은 시편 68:18을 그리스도께서 그 백성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심을 예언한 말씀으로 해석합니다. 그 구절은 원래 승리자요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 예물을 받으신다는 내용입니다.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은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내려오심’은 성육신 사건을 의미하고 ‘올라가심’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보좌에 앉으신 사건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의 목적은 “만물을 충만하게”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부활 승리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셔서 주의 백성에게 성령을 통해 은사들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각 지체에 주시는 은사는 각 지체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구원사역에서 승리하시고 선물로 나누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은혜라고 합니다. 그 은혜를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에 충만하게 되기를 소망하며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선물을 주신 목적(11~12절)
11절에 ‘그가 ... 삼으셨으니’라고 번역되었지만 헬라어 본문에는 ‘그래서 그가 주셨다’로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이나 로마서 12장에 보면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성령의 은사들을 언급하면서 사역이나 역할들을 강조하는데, 에베소서 4장은 말씀과 관련된 사역자들에게 대하여 언급합니다. ‘사도’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목격한 부활의 증인이며 초대교회를 세운 사역자를 가리킵니다. 열두 사도와 바울,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그들은 복음, 즉 예수님의 탄생과 생애, 죽음-부활-승천-좌정 사건이 어떻게 새 창조의 구원을 이룬 사건인지에 대한 권위 있는 해석을 초대교회에 선포했습니다. ‘선지자’는 넓게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전하는 자를 의미할 수 있고, 좁게는 하나님의 뜻을 직접계시로 받아 전하는 자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직접계시를 받아 성경으로 인정할 만한 계시를 전하는 ‘선지자’가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성경은 계시를 받는 대로 계속 더해져야 합니다. 새 계시가 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계시를 새롭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통해 교회의 정체성이 확립되므로 바울은 이들을 교회의 ‘터’로 여겼습니다. ‘복음 전하는 자’는 빌립과 같이 전도의 은사를 받아 복음전도에 전념하는 자입니다. ‘목사와 교사’라는 단어 앞에 정관사가 하나만 붙어 있으니 ‘목사 겸 교사’라는 뜻입니다. 목자가 풀이 많은 곳으로 양들을 데리고 가서 먹이고 이리와 같은 짐승들로부터 보호하듯이 목사는 교인들을 영적으로 돌보고 양육하고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칩니다. 그렇기에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은사가 있어야 합니다. 목사가 가르치는 사람이 될 수 있으나 모든 교사가 다 목사는 아닙니다. 은사를 주심은 개인의 능력이나 경건을 과시하거나 개인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닙니다. 모든 은사는 섬기라고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사랑 가운데 사용하지 않으면 고린도 교회와 같이 자기와 같은 은사를 가지지 않은 교인들을 무시하거나 업신여기며 갈등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 등의 직분은 다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하는 것입니다. 여기 ‘온전케 하다’는 것은 ‘갖추게 한다, 무장시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훈련시킨다는 것입니다. 훈련을 통해 성숙하게 세워 일을 할 준비를 갖추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일부터 맡기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허는 경우가 생기기도 합니다. 돌아보면 제대로 양육 하지 않고 일부터 맡겨서, 맡는 분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거나, 왜 해야 하는지 동기부여가 되지 않아 일이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은 적이 있었습니다. 잘 훈련시킨 다음에 일을 맡겨야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 온전한 공동체를 이루게 됩니다. 사역보다 감투에 관심이 많고, 사람보다 직책에 더 관심이 많으면 문제가 있습니다. ‘봉사의 일’은 교회 안팎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입니다. 직분을 안주면 일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바른 섬김의 자세가 아닙니다. 직분에 상관없이 얼마든지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함이라”(고전 12:7). 받은 은사로 섬김으로 다른 성도들을 유익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직분이 주님께 받은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직분을 잘 감당함으로 교회를 온전히 세우는 사명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는 성도(13~15절)
바울은 교회를 세우는 일에 있어서 구체적 목표를 제시합니다.
-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할 때 믿음의 대상이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바른 지식을 갖지 못한 자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바른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방인들과 구별된 삶을 사는 거룩한 제사장 나라가 되어 주변의 나라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함을 보여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전혀 그런 삶을 보여주지 못하고 주변의 이방나라들과 구별되지 않으며 도리어 그들과 같이 거짓과 불법을 행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종교적 의식에만 있었고 그것만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신들이 해야 할 의무를 다했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런 신앙은 잘못된 것이고 그런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3)라고 선포했습니다. 덧붙여서 하나님은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으시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신다고(호 6:6) 합니다. 신앙의 본질은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통하여 세상이 줄 수 없는 즐거움을 경험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많은 어려움 중에서도 주님 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팔로마한인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을 바로 앎으로써 하나님께서 진정 바라고 원하시는 바른 신앙의 모습을 회복해야 합니다.
- 온전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온전하다’라는 뜻의 헬라어‘텔레이오스’는 부러진 뼈를 맞추거나 찢어진 그물을 수리할 때, 또는 범죄한 자를 바로 잡을 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성숙과 소망에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 훈련의 내용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세상 교훈’에 밀려 흔들리지 않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쉽게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만 알아주시면 된다는 자세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성도는 험한 세상의 폭풍우와 파도 속에서도 굳건히 견딜 수 있도록 영적으로 자라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에까지 이른 상태,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 온전한 상태,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여정에 많은 실수가 있었지만 깎이고 깎이면서 그의 믿음은 성장하여 마침내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젊었을 때의 모세는 정의감과 혈기가 많았으나 광야 생활을 거치면서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영적인 지도자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덤벙거리고 허물이 많았으나,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교회가 온전히 세워지는 상태에 도달할 때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첫째, ‘어린아이’로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 세상의 유혹에 넘어지고 세상 풍조에 요동하는 어린아이 신앙에서 벗어나, 영적인 안목과 올바른 분별력을 지난 온전한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교회가 진리가 아닌 것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하게 됩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15절) 하라는 것은 문자적으로 ‘사랑 안에서 진실하라’는 의미입니다. 삶과 언행에서 진실 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실상 사랑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최고의 덕목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분 앞에서 자신을 낮추게 되고, 이웃을 사랑한다면 자신이 가진 것들을 가지고 그들을 섬기게 됩니다. 그럴 때 성도는 ‘범사에’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까지 자라게 됩니다. 여기서 ‘자란다’라는 표현은 바울이 자주 사용하는 그림언어입니다. 미성숙한 존재가 성숙한 존재가 되고, 어떤 특정한 부분만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성숙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성도의 영적 성장의 목표만이 아니라 영적 성장 자체를 가능하게 해 주는 생명력의 근원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 몸으로 세워지는 교회(16절)
교회에 열심히 사역하는 교인들도 있지만 거의 사역하지 않는 교인들도 있습니다. 직분이나 직책을 받아 섬기는 분들도 있고, 그런 것 없이도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분들이 있고, 받았어도 섬기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고 싶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안 하거나 정말로 형편이 되지 않아 못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건강한 교회가 되려면 일할 수 있는 교우들이 은사를 따라서 모두 섬겨야 합니다. 본문에 나타난“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12절),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이름(13절),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세움(16절), 이 세 구절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양육 혹은 훈련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지기 위해서는 각 지체가 그 은사의 받은 분량대로 역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부르셨기에 우리는 머리 되신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에게서’라는 표현은 모든 지체의 근원(머리)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각 지체에게 직분을 주실 뿐 아니라 각 지체가 직분을 감당할 수 있도록 계속 도우십니다. 직분과 능력은 다 그리스도로부터 옵니다. 바울은 이 점을 분명하게 깨달았기에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 1:12)라고 고백했습니다.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는데, 여기서 ‘각 마디’는 사도, 선지자, 복음 전도자, 목사와 교사와 같은 말씀 사역자들을 가리킵니다. 마디를 통해 각 지체가 서로 연결되어 몸을 지탱하게 되고 머리에서 지시하는 대로 영양과 모든 움직임을 주관하듯이 유기체로서의 교회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말씀 가운데 양육이 되고 서로 사랑을 실천하고 조화 있게 맡은 바 역할을 잘 감당할 때 교회에 생명력이 생깁니다. 같은 유니폼을 입은 선수라도 각자 맡은 포지션과 역할이 다르듯이 우리가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 한다 하더라도 각자가 맡은 역할은 다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찬양을 통하여, 어떤 사람들은 재정 관리를 하면서, 어떤 사람들은 기도를 통하여, 어떤 사람들은 봉사를 하면서, 어떤 사람들은 물질의 복을 받은 대로 헌금하며 사역을 감당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야 하지만, 그리스도가 주신 다양한 은사들을 제대로 사용할 때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져 갑니다. 교회가 자라가는 과정에 사랑이 기본요소가 됩니다.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즉 교회가 얼마나 자랐느냐 하는 기준은 교인들의 숫자가 아니라 얼마나 아가페의 사랑을 그 교회가 실천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나가면서
바울은 교회의 일치와 연합에 대한 권면을 이어갑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셨을 뿐 아니라 교회를 섬길 수 있는 다양한 은사를 주셨습니다. 성도들에게 은사를 주심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면서 구원 사역을 완성하는 승리를 이루신 결과입니다. 은사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섬김과 봉사를 위한 수단입니다. 그렇기에 자기 이익과 자랑을 위해서가 아닌 하나님 나라 건설과 확장을 위해서 겸손히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사도와 선지자들을 통하여 교회의 기초를 세우게 하시고 전도자들을 통하여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목사들은 성도들을 양육하고 말씀으로 잘 양육된 성도들이 다양한 은사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합니다. 그럴 때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믿고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함으로 채워져 세상의 속임수와 거짓 가르침에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진리 가운데 각 지체가 섬김을 다할 때 교회는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모든 면에서 닮아가며 자랍니다. 사람이 건강하려면 모든 장기가 각각 그 기능을 잘 감당해야 하듯이, 교회도 건강하려면 성도들이 각자의 사명과 직분을 잘 감당하면서 연합해야 합니다. 건강한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한 몸을 이루는 공동체, 성도들의 다양한 은사를 통해 온전한 몸을 이루는 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가 자라는 데 목표가 되실 뿐더러 성장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십니다. 몸이 자라며 세워지는 것이 사랑 안에서 행해져야 합니다. 사랑 가운데 진리를 행함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 때까지 믿음으로 성장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로서 사명에 충실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