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됨을 실현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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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1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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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와 연관된 의미를 가진 단어가 두 개 있는데 하나는 획일성(uniformity)입니다. 개개인의 특성보다는 전체로서의 통일성을 강조합니다. 획일성은 일을 추진하는데 어느 정도 효율적일 수는 있어도 지나치게 경직되거나 강제적인 연합은 구성원들의 참여의식을 떨어뜨리거나 일을 하는 기쁨을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단어는 연합하여 일을 이룬다는 의미의 통일성(unity)입니다. 서로의 특성이 다른 것을 인정하고 각자의 기량을 발휘하면서도 어떤 명분 아래 하나가 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 됨은 후자를 의미합니다. 신자들의 배경, 성품, 달란트는 다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나 자매가 되어 서로의 성장과 성숙을 위하여 섬깁니다.
에베소서의 주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만유의 통일성입니다(1:10).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심으로 하나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권속’이 되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측량할 수 없이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와 복음을 전하는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았습니다. 바울은 1~3장에서 교회가 하나 되어야 하는 신학적 당위성을 제시한 후, 4~6장에서는 교회의 하나 됨을 구현하기 위한 실제적 지침을 언급합니다. ‘혼자 있는 크리스천은 행복한 크리스천이 될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라는 이름이 뜻하는 바가 하나님이 부르신 무리,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과의 관계도 원만해야 합니다. 본문을 통해 하나 됨의 의미를 잘 깨닫고 실천함으로써 모든 교우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일치와 연합을 경험하면서 건강한 교회를 함께 이루어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 됨을 지키라(1~3절)
본문의 주제는 교회의 하나 됨입니다. 교회가 하나 되려면 먼저 부름 받은 성도들이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주 안에서 갇힌 나’라고 합니다. 직역하면 ‘주 안에서 죄수인 나’입니다. 자신이 감옥에 갇혔기에 죄수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이방인의 사도라 부름을 받은 후에는 전적으로 주님에게 매인 삶을 살았기에 ‘주님의 죄수’라고 부릅니다. 바울은 복음만 전한 것이 아니라 자신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려고 애를 썼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지만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탓하지 않고 자신을 걱정하기보다 도리어 감옥 밖에 있는 성도들을 향해 권면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라’는 것은 ‘소명에 적합한 방식으로 살라’는 의미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일”은 하나님이 성도를 부르신 목적을 가리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 앉은 하나님의 아들(1:5), 상속자(1:11,14; 3:6), 대리 통치자(2:6)가 되어 선한 일을 하며(2:10)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는 자(1:4)가 되어 영광스러운 기업을 물려받도록(1:14,18)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역할과 지위와 특권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상태에서 누리며 주께서 거하실 만한 처소로 지어져야 합니다(2:22).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변화시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부르셨습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2-3절과 다음 두 구절을 비교해봅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고전 13:4).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의 속성에 대하여, 갈라디아서 5장은 성령의 열매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주제는 다르지만 사용된 단어들과 내용은 의미하는 바가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란 고린도 전서에 나오는 사랑을 실천하는 삶과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과 연결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과 교회가 하나 되는 것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최선을 다해서 지키는 것이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의 합당한 태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 하지 않으시고 ‘세상의 소금이라’(마 5:13)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하나 되기 위해’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 되게 하신 것’이라고 말한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방인과 유대인의 담을 허무시고, 그들을 한 몸으로 새롭게 만드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은 이미 하나가 된 것입니다. ‘힘쓰라’는 현재 명령형입니다. 계속해서 힘쓰고 애써야 합니다. 하나 되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저절로 하나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하나 되려면 상당한 수고와 희생이 지속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 힘으로 하나 되는 것이 쉽지 않은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성령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합니다. 세상의 모든 교회가 그렇듯이 에베소 교회 안에도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 모두 성령에 힘입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교회에서 하나 되는 모습은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공통된 기도제목을 가지고 합심하여 기도하고, 교회 행사나 프로젝트에 한 마음이 되어 참여하고, 목장식구들끼리 돈독한 관계를 가지며 모이기를 힘씁니다. 각자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가, 다른 말로 하면 하나 되기 위해 힘쓰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있는 자리에 화목이 있고 기쁨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내가 지나간 자리마다 시험이 들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생긴다면 큰 문제입니다.
무엇이 교회를 하나 되게 합니까?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2절)
- 겸손
바울은 부르심에 합당한 삶으로 겸손을 앞세웁니다. 겸손은 당시에 종들과 같이 낮고 천한 자들이나 가져야 하는 자세로 경멸스러운 의미를 가졌는데, 예수님이 낮아지신 후에 모든 성도들이 가져야할 자세가 되었습니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부족함, 죄인 됨, 한계를 인정하는 자세입니다. 겸손은 대인관계에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자세입니다. 바울은 겸손의 본보기를 예수님에게서 찾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이 되신 것이 겸손의 극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겸손’이라 했으니 철저하게 겸손해야 합니다.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누구를 대하거나 겸손해야 합니다. 또한 겸손은 다른 사람이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자기가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더 이상 겸손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처럼 진심으로 상대방의 가치를 인정하고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 온유
‘온유’란 ‘굉장한 힘이 어떤 일정한 방향으로 잘 조절되어 나타낼 때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반면에 온유하지 못하다는 것은 ‘다듬어지지 않아서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온유함으로 다듬어지도록 때로 고난과 역경을 허락하십니다. 모세가 광야 훈련을 통해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진정한 온유는 절제와 덕에서 나옵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고전 10:23)라고 하면서 바울은 자유과 권리가 있다고 해도 다 쓰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덕을 세우라고 합니다. 온유하려면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부드러운 성품과 통제된 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온유는 ‘외유내강’의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은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딤후 2:10)라고 하면서 대인관계에서 쉽게 노하지 않고 자신을 제어할 줄 아는 덕을 언급합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는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님을 통하여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악으로 악을 갚지 않으시고 욕을 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의 맘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8). 겸손은 자신을 과시하지 않는 것이고, 온유는 자신의 권리를 내세우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겸손과 온유의 완벽한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 오래 참음
영어에서 short temper라 하면 화를 벌컥 잘 내는, 신경질을 잘 내는 성격을 말합니다. 오래 참음은 문자 그대로 long temper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을지라도 바로 대응하지 않고 참는 것입니다. 오래 참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은혜와 사랑의 증표였습니다. 만약 우리의 죄악과 허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즉시 심판을 내리셨다면 우리 중 아무도 여기에 없었을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9절에서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하나님께서 우리를 오래 참아 주셨던 것처럼 우리 역시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참고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있는 사랑의 속성 중에 먼저 나오는 것이 ‘오래 참고’입니다. 갈라디아 5:22절에서 성령의 열매를 언급할 때도 ‘오래 참음’이 나옵니다. 인간의 의지로는 오래 참기가 쉽지 않으나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때 오래 참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 서로 용납
함께 몸을 맞대고 사는 부부들도 살다 보면 갈등이 생기는데 살아온 배경과 환경이 다르고 성격이 다른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서 갈등과 긴장이 없을 수 없습니다. ‘서로 용납’한다는 것은 대인관계에 있어서 상대방의 약점과 허물을 포용하며 받아들이는 적극적인 자세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용납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 되기 위함일 뿐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용납하셨고 지금도 용납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모습 이대로 받아주신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조건을 만족시켰기 때문에 기특해서 받아주신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다보면 마음이 안 맞는 경우도 있게 마련입니다. 비록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넓은 마음을 가지고 그 사람을 감싸주어야 합니다. 서로 이해하고 용납하면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이 됩니다. 반면에 조그만 실수라도 발견하면 들추어내고 ‘아무개는 이렇다더라’하며 소문을 퍼뜨린다면 화평이 깨어집니다. 서로 용납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자기에게 억지로 맞추게 하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왜 갈등이 생깁니까? 나와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취급하고 자꾸 자기에게 맞추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5:7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서로 돌아보고 격려할 때에 분란이 사라지고 교회는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과 사랑, 서로 용납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습입니다. 다양성이 존재하는 교회 안에서 하나 됨을 실현하면서 부르심에 합당하게 산다는 것은 예수님을 본받아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평안의 매는 줄’은 평안이 흩어진 것들을 한데로 묶어 ‘매는 줄’역할을 한다는 표현입니다. 성령께서 교회를 하나로 묶어 놓으셔서 갈등을 해소시키고 화평한 관계로 회복시키십니다. 바울은 앞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적대적인 관계가 예수님을 통해 회복되었기에 그분을 ‘우리의 화평’(2:14)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이루신 새 창조적 구원과 화평의 성취를 인식하고 ‘평안’을 이루어 성도들을 하나로 ‘매는 줄’이 되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평안으로 연합을 이루는 것이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것을 힘써 지키는 일입니다.
하나 됨의 근거(4~6절)
비행기 한대는 수십만 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 몸도 수많은 세포와 신경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이 건물도 수많은 자재와 부품이 모여 지어졌습니다. 한 부분만 놓고 보면 대수롭지 않을 수 있지만 전체가 완성되면 의미 있는 하나가 됩니다. 각각의 개성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그 개성이 하나로 잘 융합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가 되어야한다고 모두의 의식과 행동이 획일적이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적이고 영적인 통일성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외모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취미도 다르지만 공통점도 많습니다. 우리는 모두 십자가 앞에 죄인입니다. 예수님의 구원과 영생이 필요합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바울이 ‘하나 됨’을 강조하는 이유는 신자의 하나 됨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하나 됨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1-22).
바울은 성도들이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켜야 하는 중요한 근거와 그 여러 요소들을 제시합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 ”‘하나’라는 단어가 7회나 등장하는데, 이 단어는 성도라는 존재의 본질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교회는 여러 지체를 가졌으나 하나입니다. ‘한 몸’은 교회가 하나의 유기적 공동체임을 나타냅니다. 교회가 이 본질을 유지할 때에만 자기 정체성을 갖게 됩니다. 1:23에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합니다. 2:16에서는 교회를 ‘둘’이 ‘한 몸’이 된 실체라고 말합니다. 사람의 몸이 나뉠 수 없듯이 ‘한 몸’으로서의 교회도 나뉠 수 없습니다. ‘한 성령’은 한 몸이 된 교회가 성령과 연합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인간의 몸 안에 영혼이 있듯이, ‘한 몸’으로서의 교회에는 ‘한 성령’이 임재하십니다. 성령께서 구원의 보증으로 믿는 자들에게 인치시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여시고, 교회에 거하십니다. ‘한 소망’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관련된 개념으로, 그 부르심의 대상인 신자 공동체, 곧 교회는 하늘의 신령한 복들, 특히 구원에 대한 일치된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에는 그리스도 밖에 있던 자들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던 자들이었으나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한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한 소망’은 교회가 구원이라는 최종 목적지를 향해 전진해 나아가는 실재임을 나타냅니다. 성도들의 궁극적인 소망은 1:10에 나옵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는 것 즉 구원의 완성을 바라봅니다. ‘한 주’는 교회가 오직 한 통치자, 곧 한 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다스림을 받고 있는 실재임을 나타냅니다. 그 분이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한 믿음’은 교회가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신앙 공동체임을 나타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구주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천하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습니다(행 4:12). ‘한 세례’는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상징하는 거룩한 의식을 통해 이루어진 신앙 공동체임을 나타냅니다. 세례 의식은 ‘한 믿음’의 공동체에 가입하는 공식 절차입니다. 모든 신자는 영적 세례 곧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사심에 연합함으로써 거룩한 공동체의 지체가 됩니다. ‘한 하나님’은 교회가 만물 위에 뛰어나신 참 되신 한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 공동체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통일시키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지상에 교회를 설립하셨습니다. 그분은 만물을 초월해 계시며 또한 만물 안에 편재해 계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믿는 사람들 가운데 함께 거하십니다.
이제까지의 내용을 정리하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하나로 연합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한 성령을 받았고,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고, 한 주를 섬기고, 한 믿음을 가졌으며, 동일한 세례를 받아 한 몸의 지체들이 되었고, 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며, 어떤 경우에도 나뉘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서로 대립하고 반목한다면, 그것은 한 하나님, 한 주님, 한 성령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훼손하는 것이며,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하나 되게 하셔서 한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만일 교회가 나뉜다면 교회를 통해 우주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고 통일하시고 그 안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이 나뉘시는 것이나 다름없게 됩니다. 교회의 하나 됨은 모든 성도가 함께 힘써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가면서
하나 됨을 유지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힘써 지키라”라고 말했습니다. 교회의 하나 됨을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동시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음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 안에 하나 됨을 깨뜨리는 요인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갈등 속에서 교회 생활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잘못이 크고 작은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갈등은 양쪽 모두에게 잘못이 있습니다. 갈등을 가진 동안 자기 생각이 맞는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사람은 무시하게 됩니다. 야고보서를 보면 교인들 사이에 시기와 다툼이 있었습니다. 서로 비방하고 정죄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약 4:1)하면서 교회에서 비난과 비방, 싸움과 다툼, 대립과 분열이 생기는 것이 욕심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 하나 됨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궁극적인 목표는 만유를 통일하는 것, 다시 말하면 하나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가 되어야 하되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에 계셔야 합니다. 교인들의 신앙적인 배경이 다르고 개성이 다르고, 재능이 다르고, 믿음의 분량이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부름을 받아 한 가족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몸을 이룬 지체가 되었습니다. 성숙한 교회가 되기 위하여 주님께서 부르신 부름에 합당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겸손하고, 온유하며, 오래참고, 사랑 안에서 서로 용납함으로서 주님께서 이루신 하나 됨을 주님이 오실 때까지 힘써 지켜 나아가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와 진리의 말씀을 중심으로 교회 공동체가 함께 섬기고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시대와 상황은 달라도 하나님이 복 주시는 교회의 모습은 여전히 같습니다. 교회는 하나 됨을 깨뜨리려는 위협과 도전을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구원과 회복을 이루는 교회,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사명을 감당하는 건강한 교회, 선교적 교회로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그곳이 가정이든, 직장이든, 교회든 하나 되기를 힘쓰며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면서 주님의 흔적을 남기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