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시오며

Author
Date
2024-08-04 22:48
Views
91
성경구절 : 엡 3:14~21


바울은 위대한 전도자이면서 아울러 신실한 목회자였습니다. 그는 복음을 열심히 전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가 받은 계시, 깨달은 지혜, 겪은 경험 모두를 성도들과 나누며 섬기기 원했습니다. 1장에서 살펴보았던 것 같이 바울이 삼위 하나님을 통하여 베푸신 신령한 복을 감옥에서 묵상하면서 감격해 하며 감옥 밖에 있는 성도들도 자기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감격하며 그들도 자기처럼 주님을 닮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쓰고 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바울의 마음이 오늘 본문에도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계시를 통하여 교회가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게 하려는 하나님의 경륜을 나타내는 목적으로 사용되어야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도우시는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을 알았기에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1:15~19).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성령을 통해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그들이 소유한 복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기를 구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두 번째 기도를 드립니다. 바울의 기도대로 이 예배를 드리는 모든 분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져서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그분께 온전히 영광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는 바울(14~15절)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의 풍성함에 대해 설명한 바울은 이제 이 모든 은혜를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합니다. 14절을 시작하는 ‘이러므로’는 1~13절에서 언급된 내용을 반영합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 따라 ‘비밀의 경륜’을 나타내신 것과 이 일을 위해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아무리 귀한 진리라 할지라도 그 진리가 성도 각자의 마음속에 새겨지고 말씀대로 순종해야만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려면 성령의 도우심이 필수적이기에(고전 2:10-12), 바울은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지도자들의 기도자세는 다양합니다. 아브라함의 종인 엘리에셀이 이삭의 아내를 구할 때, 서서 머리를 숙여 기도했습니다(창 24:26).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할 때, 온 회중을 마주보고 서서 하늘을 향하여 손을 펴고 큰 소리로 기도했습니다(왕상 8:22). 세리가 성전에서 서서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기도했습니다(눅 18:13). 다윗은 여호와의 전에서 앉아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대상 17:16).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땅에 꿇어 엎드리고 얼굴을 두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했습니다(왕상 18:42).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기도하셨습니다(마 26:39).

바울은 무릎을 꿇는 자세를 취하고 중보기도를 드립니다. 바울의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한 것은 일차적으로 하나님과 그분의 계획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과 성도들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친밀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감을 의미합니다. ‘족속’으로 번역된 헬라 단어는 아버지와 같은 어원을 가지며 한 아버지를 모신 가정, 족속, 나라를 의미합니다. ‘각 족속’은 문자적으로 ‘모든 가족’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나뉘었던 인류를 모두 하나님의 양자와 상속자로 삼아(1:5)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가족으로 통일시키셨습니다(2:15,19). ‘하늘과 땅에 있는’온 가족은 현재 땅에 살아 있는 성도들과 죽어서 하늘에 올라가 아버지의 임재 가운데 있는 자들을 포괄하는 표현입니다(롬 14:9). 바울은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한 가족 전체의 아버지 앞에 기도를 드립니다. 구약에서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이름을 짓는 자가 지음 받은 것을 주관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사 40:26).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족속을 통치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온 땅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며 기도할 수 있는 권세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기도하는 것은 곧 통치자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속사람이 강건하게 되도록(16~17절)
16~19절은 세 개의 목적절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세 가지 제목으로 기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기도제목이 16~17절에 나옵니다.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이 기도는 1:17~18에 나오는 기도와 의미상 거의 비슷합니다. 기도의 핵심은 ‘속사람을 강건하게’해 달라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우리를 낙심시키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에베소서 1:14에 ‘내가 당한 환란 때문에 너희가 낙심하지 않기를 당부한다’라고 권면합니다. ‘낙심’과 ‘강건’은 정반대의 의미를 가집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는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선언합니다. 과거의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육체를 따라 생각하고 행하던 것들이 다 지나가고 이제는 성령을 따르는 새로운 삶의 체계가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될 자를 찾아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들렀을 때 하나님께서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외모는 단순히 얼굴 생김새나 옷차림만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겉사람은 외모 뿐 아니라 지식, 생각을 모두 포함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겉사람에 초점을 두기 때문에 겉사람을 강건하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지식을 추구하고, 업적을 쌓으려고 하고, 외모를 가꾸려고 하고,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낙심합니다. 그런데 세월의 흐름은 누구도 막을 수 없기에 시간이 지나면 겉사람은 약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속사람’은 성령에 의해 영광스럽게 변화되는 내적인 부분을 가리킵니다. 고난을 겪으면서도 우리의 속사람은 영적으로 새로워지고 강건해집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다도 속사람이 바로 완전하게 되는 것은 아니기에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영적인 자양분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 예수님을 닮아가는 과정입니다. 죄로 인해 타락하여 마귀를 닮아가던 죄인이 이제 십자가 복음으로 인해 속사람이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우리의 마음의 동기와 말과 행동과 삶의 방향이 계속 변화해야 하고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에 그분과 같이 충만한 영광에 참여해야 합니다. 개역판 번역에는 ‘속사람을 강건하게’해 달라고 되어 있지만, 원문을 번역하면 ‘속사람에게까지 강건하게’입니다. 사람의 외모나 외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내적 부분도 강건하게 되기를 바울은 기도하고 있습니다. 곧 우리의 심령이 강건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4:23). 그런데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하게 되는 것은 ‘성령을 통하여’가능합니다. 성령은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며 능력 있게 하십니다. 다윗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라고 담대하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흥망이 달린 위기의 순간에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7) 하며 삼일을 금식한 후에 에스더가 왕 앞에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순교하면서도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라고 기도하면서 숨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었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주님과 교제하고, 말씀을 통하여 진리를 깨닫고,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성도의 교제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고 서로를 세우며, 전도를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도 구원의 도를 전하는 것은 모두 성령을 통한 능력을 체험할 때 가능합니다.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 은혜와 능력과 영광에 있어서 풍성하신 분이심을 나타냅니다. 바울은 그러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의 역사를 따라 우리가 성령으로 강건하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1:19).
-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17a절)
속사람이 성령님의 능력으로 강건하게 되도록 바울이 기도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우리들의 마음가운데 계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계신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는 ‘카토케이오’인데, 이것은 그냥 계시는 것이 아니라 한 곳에 오랫동안 거주하는 것을 말합니다. 곧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에 충만히 임하시고, 강력하게 지배하시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해달라는 것과 내용상 일맥상통합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 14:16) 하시면서 예수님은 성도 안에 성령이 거하실 것을 기도하셨고,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성도 안에 계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에 계신다는 것과 성령이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는 것은 결국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날마다 그리스도의 임재를 체험하며 우리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됩니다.
- 사랑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도록(17b절)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는 분사구문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를 부연 설명합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정착하시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합니다. 바울은 믿음을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이해합니다. 곧 형제를 사랑하고 돌보는 자라야 진정으로 믿음이 좋은 자이며 성령 충만한 자로 보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말씀대로 잘 행할 때 그의 신앙은 반석위에 세운 집과 같이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견고히 서게 됩니다(마 7:24). 뿌리가 제대로 박힌 나무가 잘 자라듯이 사랑은 믿는 자들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야 하는 토양이요, 그들이 세워져야 하는 토대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아가페의 사랑을 보여주셨기에 믿는 자들도 다른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사랑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5장과 6장에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종과 상전의 관계 속에서 가져야 할 태도는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5:21)입니다. 어떻게 피차 복종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바울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합니다(5:18).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하여지고, 믿음이 견고하여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며, 사랑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다른 사람들에게 아가페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깊이 뿌리 내리며 사랑을 실천하는 인생이 되게 해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크기를 깨달아 알도록(18~19절)
두 번째 기도제목이 18절과 19절 전반부에 나옵니다. 헬라 원문과 개역 성경의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직역하면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무엇인지 깨닫고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기를 구하며’입니다. ‘넘치다’는 동사는 ‘초월하다’는 뜻을 가집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지식을 뛰어 넘습니다. 어떤 사람이 복음에 대한 지식을 아무리 많이 갖추었다 해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지 못하면 그 지식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고전 8:1). 그리스도의 사랑이야말로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의 사랑의 결정적 증거입니다(롬 5:8). 바울은 인간의 지식으로는 도저히 측량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길이를 깨닫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3차원 세계에 살고 있는지라 길이, 넓이, 높이만 있으면 충분할 것 같은데 바울은 깊이를 더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측량할 수 없을 만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야말로 어떤 이론이나 철학과도 비교할 수 없는 숭고한 영적 지식이요 구원의 지혜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이 모든 사람을 품을 만큼 ‘넓고’, 영생에 이르기까지 ‘길며’, 모든 죄인을 용서할 만큼 ‘깊고’, 죄인들을 하나님의 보좌로 인도할 정도로 ‘높은’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기를 간구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를 대할 때 교회는 하나가 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모든 성도들과 함께’깨닫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코끼리가 무엇인지 모르는 소경들에게 코끼리의 몸을 한 부분씩 만지면서 느낌을 말해보라고 한다면 다리를 만진 소경은 기둥 같다고 하고, 상아를 만진 소경은 딱딱하고 끝이 뾰족하다고 하고, 피부를 만진 소경은 쭈글쭈글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각 사람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는 내용이나 정도가 전부 틀립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크고 넓고 깊은 사랑을 좀 더 알려면 하나님의 자녀들의 경험을 함께 나누는 것이 필요합니다. 남녀노소, 인종이나 계급의 구별 없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인 교회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온전하게 체험해야 합니다. 모든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더욱더 그리스도를 알게 되어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로 모시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 삶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되도록(19절)
세 번째 기도제목은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에까지 충만해 지는 것입니다. 바울의 기도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원받기 전 우리는 죄로 인해 공허하고 상실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지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온전히 머무시고,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와 너비, 길이와 높이를 깨달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충만하심의 정도까지 충만해집니다.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의 충만이라고 1:23에 언급되어 있으나 그것은 종말에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이루어질 것이요, 아직 이 땅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충만하게 되기를 간구합니다. 타락된 이 세상을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경륜 속에,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시고자 하는 계획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신 그리스도가 교회를 충만케 하십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삶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라”(4:13).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라”(빌 4:12). 성령의 능력을 어느 누구보다도 깊게 체험한 바울이었으나 그 자신이 아직 충만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충만함에 이를 때 비로소 구원이 완성됩니다.

송영(20~21절)
마지막으로 바울은 하나님께 대한 송영으로 그의 기도를 마칩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대로 ... 능히 하실 이’는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능히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보다 더 넘치도록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빌 4:7). 우리 생각이나 기도는 부족하여 마땅히 생각할 바를 생각하지 못하고 마땅히 구할 바를 구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롬 8:26). 그러나 우리의 모든 생각과 원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지 못하고 구하지 못한 것까지도 이루어 주십니다(시 37:5). 우리가 기도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전에는 우리의 사정을 잘 모르셨는데 기도했기에 비로소 우리의 사정을 아시고 응답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전지전능하십니다. 기도의 본질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런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를 기뻐하며 믿음으로 간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우리의 수준이 아니라 그분의 수준에 맞게 베풀어 주십니다. 바울은 하나님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기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교회 안에서’란 말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장소 또는 영역이 ‘교회’라는 뜻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통해서도 영광을 받으시고, 그가 지으신 ‘피조물’을 통해서도 영광을 받으시지만, 특히 강조하는 것은 그의 독생자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입니다(행 20:28).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므로(엡 5:23, 1:23),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교회’를 통해 영광을 받기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지상의 교회가 비록 부족할지라도 하나님이 귀하게 보시고 하나님이 영광받기 원하시는 존귀한 공동체임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교회를 우습게 여기고 조롱하고 비난하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모독하는 자입니다.

나가면서
1장부터 3장까지 살펴볼 때 하나님의 능력이 어떻게 역사하였습니까?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고, 허물과 죄를 인해 영적으로 죽은 우리를 살리셨고, 이방인들도 구원하셔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새로운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의 지체가 되게 하셨습니다. 바울에게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의 비밀을 알게 하시고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이에 바울은 인간의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풍성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역사하도록 두 번째 기도를 드렸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하나님의 백성 모두의 아버지로 표현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정체성과 이름을 부여받은 한 가족입니다. 이들을 위한 바울의 간구는 하나님이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새 창조의 능력으로 성도들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간구한 이유는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와의 믿음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멸망 받아야 했던 이들을 위해 피 흘리시고 당신과 연합시켜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었으면 믿음도 없었을 것이며 그리스도의 내주하심도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와 이런 사랑의 관계를 지속할 때, 성도들은, 바울의 마지막 간구대로,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영광이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무궁하기를 바라며 기도를 마칩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고난을 겪지만 우리가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이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을진대 언제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을 통하여 날마다 강건하여지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날마다 깨달으며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날마다 충만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