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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어진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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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30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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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엡 2:1-10


어느 교회나 건강하게 부흥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건강한 교회론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건강하지 못한 교회관이 그릇된 목회철학과 방법론을 양산해 내고 교회성장만을 지상 목표로 삼습니다. 이런 면에서 에베소는 교회에 매우 중요한 서신입니다. 에베소서는 바울 사상의 진수라 불리며 바울의 신학 중 교회론이 탁월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2장에서 에베소서의 본론이 시작됩니다. 본론의 전반부(2:1~3:21)는 개인의 구원 문제를 다룬 구원론과 구원받은 무리의 문제를 다룬 교회론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구원론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바울은 1장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며 언급한 중요한 주제들을 2장에서 상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1:3)을 주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시고, 성자 하나님은 우리를 속량하시고, 성령 하나님은 구원의 날까지 우리를 인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습니다. 1장 말미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고, 또 높이셔서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2:1의 첫 단어를 ‘그리고’로 사용하며 흐름을 전환시킵니다. 하나님의 충만과는 거리가 먼, 허무한 가운데 굴복하던(롬 8:20), 구원받기 전의 상태를 1~3절에서 설명합니다. 이어지는 4~7절에서는, 이러한 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어떠한 일을 하셨는지, 8~10절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이 구원의 성격을 설명합니다. 2장의 특이한 구조는 ‘그때’와 ‘이제’의 대비입니다. 1~10절에 ‘그때에’만 2번 (2,3절) 나타나고, ‘이제는’이라는 단어 자체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4~10절의 내용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제’우리가 누리고 있는 구원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그리스도로 말미암아’얼마나 놀라운 일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드러났는지를 강조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어진 구원의 의미와 성격을 잘 이해하고 신실한 성도로서 주님을 감격시키는 헌신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구원 받기 전의 상태(1~3절)
바울은 1~3절에서 구원받기 전 인간의 상태를 간결하게 설명합니다. “살리셨도다”는 표현이 헬라어 원문에 없습니다. 1절은 ‘너희가 너희의 허물들과 죄들로 죽어 있었을 때’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너희’라는 단어는 3절에 등장하는 ‘우리’와 대조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에베소 교회에 있는 이방인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구원받기 전 그들의 영적인 상태는 ‘죽었다’는 것입니다. ‘허물’로 번역된 단어는 ‘잘못된 발 디딤’(a false step)의 의미가 있습니다. ‘죄’로 번역된 단어는 ‘과녁을 벗어남’(a missing of the mark)의 의미가 있습니다. 모두가 정상에서 벗어난 것을 뜻합니다. 비슷한 말들을 열거함으로 죄가 심각하고 다양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타락된 세상에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죄에 접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곁을 떠나 소돔과 고모라에 정착한 롯과 그의 가족들은 알게 모르게 성적으로 타락된 주민들에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소돔을 멸망시킬 천사들이 롯의 집에 들어온 것을 이유로 많은 소돔성의 남자들이 타락한 행동을 하려 몰려들었을 때 롯은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치 말라”하며 대신 남자를 가까이 아니한 자기의 두 딸을 마음대로 하라고 말할 정도로 죄악의 도시에 살면서 죄악에 알게 모르게 젖어 들었습니다.

비정상적인 상태에 있으면 정상적인 것이 오히려 비정상적인 것처럼 여겨집니다. 정직한 삶을 도리어 바보스럽거나 무능한 것으로 몰아세우고, 자신의 지위나 권력을 이용하여 축재하면서도 자신을 정당화하는 뻔뻔스러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은행 돈을 잘 끌어 쓰는 것을 능력으로 과시하며 마구 끌어 쓰다가 제때에 갚지 못해 파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죄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갖지 않는 것입니다. 살인, 도적질, 간음 등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제대로 갖지 못할 때 생기는 결과일 뿐입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사 59:2).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하나님과 그들 사이를 멀어지게 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우리의 삶은 허물과 죄로 얼룩져 있기에 죽었던 삶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2:17). 아담과 하와가 그 과실을 따 먹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육신의 생명이 끝난 것이 아니라 에덴동산에서 쫓겨남으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끝이 난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가 없는 삶은 육신적으로 살아있으나 영적으로는 죽은 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죄를 많이 지었건 적게 지었건 똑같이 죄인입니다.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이방인 성도들의 이전 특성을 ‘이 세상 풍조를’따라 죄 가운데 행하던 자들이라고 합니다. ‘세상 풍조’는 악한 영의 지배를 받고 있는 세상의 질서를 의미합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란 마귀를 유대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일층이 땅으로서 사람이 거주하는 곳이고, 이층이 공중으로서 마귀가 거주하는 곳이며, 삼층이 천국으로서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에베소 교인들이 과거에는 마귀에 종속되어 그의 지배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불순종의 아들들’이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대적하여 불순종하는 악인들을 말합니다. 결국 세상 모든 악행의 배후에는 마귀가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조종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타락시킵니다.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다니며 지금도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회심을 하기 전에는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들도 사탄의 영향력 아래 살았으며, 자신들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했습니다. 바울은 ‘우리’라는 말로 자신도 그러한 삶을 살았음을 고백합니다. 여기서 ‘육체’는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의 비참한 상태, 지혜와 계시의 영의 부재로 인해 하나님을 모르는 영적 무지의 상태입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 때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게 됩니다. 식욕, 성욕 자연스러운 것이나 육체로 원하는 것이 지나치면 탐욕이 되고 음욕이 됩니다. 마음으로 원하는 것이 지나치면 남을 시기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게 됩니다. 이렇듯 인간은 세상 풍속을 좇고, 사단의 노예가 되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면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벧전 1:16)라고 하시며 악을 미워하시고 거룩함을 요구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불신자 유대인들은 율법을 소유했음에도 “본질상 진노의 자녀”입니다(롬 2:1~5).

구원의 주체: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4-7절)
바울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가 어떻게 생명을 얻게 되었는지 말합니다. 바울은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먼저 유대인 성도들과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다룹니다. 특별히 바울은 이 단락을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으로 시작하는데, 이는 유대인들과 하나님의 특별한 관계성을 부각합니다. 반면에, 8절에서 이방인과 관계된 단락은 ‘은혜’로 시작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은 그의 ‘긍휼하심’과 ‘풍성하신 사랑’으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긍휼’은 자비와 동정심을 뜻하는 말로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셨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1:20에서 예수님께 사용되었던 ‘일으키다’와 ‘앉히시다’는 동사를 바울은 복합동사인 ‘함께 일으키셨고’, ‘함께 앉히셨다’는 동사로 바꾸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신 부활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서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보여 줍니다. ‘함께’는 그리스도와 연합됨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살리셨고, 일으키셨고, 앉히셨다’는 세 동사가 모두 부정과거 시제로 기록된 것은 그 모든 일이 이미 일어난 일처럼 확실하고 확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새 생명을 주셔서 살리신 것은 과거의 일이고, 하늘나라에서 영화롭게 되는 일은 분명히 미래에 일어날 일이지만, 이미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다는 뜻입니다.

원래 멸망 받아야 할 죄인들이 그리스도와 연합해 부활-승천-좌정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따라서 구원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겪은 후 그와 함께 다시 살아나 새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왕 노릇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아담에게 타락 전에 주셨던 왕적 지위(창 1:26~28)를 가리킵니다. 아담의 죄로 인해 인류는 이 지위를 상실했으나 그리스도를 통해 그 지위가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믿음으로 구원을 확신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완성하실 종말에 나타날 구원을 기다리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시는 목적은 오는 여러 세대에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보이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를 일으키시고 보좌에 앉히신 하나님의 크신 능력, 성도들에게 역사하였던 그 크신 하나님의 능력이 이 세상 끝날 까지 계속해서 하나님의 진노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구원이 단순히 우리만의 사건이 아니라 후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보여 주는 사건임을 알려줍니다.

구원, 하나님의 선물(8-10절)
바울은 여기에서 다시 이방인의 구원 문제를 다룹니다. 이방인의 구원 또한 그리스도를 통해 베푸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긍휼’에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8절은 ‘그러므로 은혜로서’라는 어구로 시작하는데, 이 은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실현되었고, 이것으로 구원을 받게 된 대상은 ‘너희’, 즉 이방인 성도들입니다. 바울은 이것이 ‘너희’에게서나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물’임을 강조합니다. ‘선물’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어떠한 인간적인 요소도 가미될 수 없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미 5절에서 삽입의 형태로 선언하였던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얻었음’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8절에서는 ‘믿음으로’라는 조건을 붙입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지만 그 구원이 우리의 것이 되려면 믿음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는 것이고,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 즉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을 전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라는 표현에서 ‘이것’은 중성대명사로 문법적으로 볼 때 앞에 있는 전 과정을 말합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이방인 성도들이 구원받은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원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는 있어도, 자기 힘이나 의로 얻어낸 듯 자랑할 순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지위가 사람의 노력을 통해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자랑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이를 강조하는 이유는 유대교의 실패를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택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위가 주는 기득권만을 누리려 했을 뿐, 감당해야 할 사명은 등한시했고,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누구이며 왜 존재하는지를 질문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우리의 첫 번째 태어남이 생물학적 출생이라면, 두 번째 태어남, 즉 거듭남은 영적 출생입니다. 첫 번째 출생과 마찬가지로 두 번째 출생 역시 우리의 의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거듭나게 된 목적과 뜻을 알아야 합니다. 개역성경에서는 10절이 ‘우리는’으로 시작하는데, 헬라어 본문은 ‘그의’라는 소유격으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지으심을 받은 자들인데, 지금 누구에게 속한 존재인지 말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의 도움 없이 흙에 생기를 불어넣어 만드셨는데 그때와 마찬가지로 인간들이 구원을 얻는 과정에도 인간들의 도움이 없이 하나님의 역사로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라고 한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전에는 허물과 죄 가운데서 행하던 자들이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선한 일을 행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디도서 2:14에서도 비슷하게 말합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우리 자신만을 위해 살아 왔다면,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선한 일’은 창조 질서와 아름다운 모습대로 회복하는 것이며,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 등 깨졌던 관계를 화평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창 1:26~28; 2:15)인 ‘선한 일’은 먼저 율법으로 요구되었는데,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백성의 삶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선한 일의 주체가 되도록(“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창세 전에 택하셨습니다. 따라서 선을 행하는 것이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구원받은 자의 필연적인 열매이며 증거입니다. 구원을 과거의 사건으로만 머물게 하지 말고, 구원의 목적에 따라 현재의 삶 속에서 선을 행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자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우리는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까?
- 옛 사람으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모습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상황이었습니다. 마귀의 권세 아래 있었으며 세상의 풍조와 육체의 욕심과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따랐습니다. 바울의 표현대로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비참했던가를 깨닫는 것을 주님 안에서 신실함을 유지하는 데 매우 큰 역할을 합니다. 우리의 육신이 있는 동안에는 계속해서 우리의 옛 사람으로 돌아가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구원받았음에도 세상 풍조에 이끌리고 있지 않습니까? 구원의 감격이 사라지고 은혜에 둔감해지지 않도록 우리의 과거가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비참함과 무지 가운데서 죽음을 향해 치닫던 우리를 하나님이 은혜와 진리 가운데로 불러 주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주님만을 바라보며 믿음에 굳게 서야 합니다. 성도들은 여전히 세상 속에서 살아야 하고 계속해서 영적인 싸움을 해야 합니다.
- 새 사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택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특권만을 누리려 했을 뿐, 열방에게 하나님을 전해야 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기에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나라 잃은 백성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교회가 선한 일을 위해 지으심을 받은 존재, 곧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로서 영생이라는 놀라운 선물을 하나님께 받았습니다. 구원으로 인해 우리의 성품이 변했고, 삶의 목적 역시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원받은 자로서 그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을 지키는 일이요, 이웃에게 선한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고, 성도와의 교제를 나누면서 하나님의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거룩함과 선한 행실로서 구원받은 자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이웃에게 보여 주며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나가면서
바울은 구원받기 전 우리의 모습을 허물과 죄로 죽었던 참담한 상태로 표현합니다. 그러던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를 살리신 것입니다. 우리의 죽음이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의 수치가 영광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은 전적으로 선물을 주시는 분에게 공로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구원받을 만한 이유가 우리에게 있거나, 혹은 우리가 어떤 일을 행했기 때문에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만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조차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선물은 구원과 함께 우리의 믿음까지 포함합니다. 믿음은 그분이 우리를 위해 하신 것을 믿는 것, 즉 우리의 마음을 열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신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이제 우리가 그분을 위해 사는 삶, 즉 우리를 위하여 이미 이루신 구원이 우리에게 역사하도록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사는 삶을 말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라”(갈 2:20). 성도는 하나님이 은혜로우신 사랑과 능력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다는 것을 고백할 뿐 아니라 삶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세상의 풍조’(엡 2:2)를 따라 살던 우리가 이제는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 부름 받은 자들이 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동체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 권세를 세상에 드러내는 유기체입니다. 선한 일을 위해 지으심을 받은 존재, 곧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새로운 피조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구원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에 감사하며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기쁨으로 감당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