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새 하늘과 새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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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7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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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계 21:1-8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면서 그저 달리기만 한다면 그 인생은 별로 의미가 없다 하겠습니다.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가야할 곳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까? 성경은 우리들이 가야할 목적지에 대해 분명히 말해 줍니다. 창세기 1장과 연결해서 생각해 본다면, 인생은 분명한 시작도 있고 분명한 마침이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제시하는 기본적인 세계관입니다. 놀라운 것은 본문이 제시하는 우리들의 마침이 믿을 수 없는 정도로 영광스러운 결말이라는 것입니다. 17~20장에서 악의 세력(바벨론, 두 짐승, 용)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이 모두 마무리됐습니다. 본문은 종말의 완성으로 접어드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새 예루살렘이 내려옵니다. 하나님이 사람들과 함께 계셔 눈물을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과 애통과 아픈 것이 없을 것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만물을 새롭게 하십니다. 이기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지만, 그렇지 못한 자들은 둘째 사망을 당합니다. 어린양의 신부를 위해 준비된 그 곳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1-5절)
요한이 ‘새 하늘과 새 땅’을 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이사야 65:17의 ‘새 하늘과 새 땅’과 병행을 이룹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형용사 ‘새’는 ‘질적으로 다른’, ‘전에 없던’것을 의미합니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과 바다는 없어졌고”는 직역하면 ‘왜냐하면 처음 하늘과 새 땅이 사라졌기 때문이다’가 됩니다.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는 ‘그 바다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더라’입니다. ‘그 바다’는 계시록 13:1에 짐승이 나오는 ‘악한 근원’입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첫 번째 짐승이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시켰으며, 두 번째 짐승인 거짓 선지자는 사람들에게 짐승의 표를 받도록 강요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던 사탄과 짐승과 세상의 권세들과 사람들이 다 심판을 받은 후에 하나님의 통치 아래 새로운 세상이 온전히 회복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하늘과 새 땅은 단순히 타락 이전의 피조세계로 회복됨을 넘어 원래의 창조 목적이 성취된 창조의 완성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이 보니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으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에서 예루살렘이 ‘거룩한 성’으로 불린 것처럼(사 52:1) 새 하늘과 새 땅에 있는 새 예루살렘도 ‘거룩한 성’으로 불립니다. 계시록의 새 예루살렘은 갈라디아서의 ‘위에 있는 예루살렘’과 연관됩니다(갈 4:26). 새 예루살렘은 남편을 위해 단장한 신부의 모습에 비유됩니다. 19:7에서 성도들이 어린양의 신부로 소개되었는데, 21:2에서는 성도들이 거하게 될 새 예루살렘이 신부로 묘사됩니다. 신부는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에게만 충성하여 신실하게 믿음을 지킨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킵니다(19:6-8). 신부처럼 단장한 새 예루살렘은 자주색 옷과 붉은 옷과 보석으로 사치스럽게 치장한 바벨론과는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신부로서 표현하는 이러한 비유는 구약성경에서 자주 나타나며(사 54:6, 호 1:2) 신약성경에서는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나타냅니다(마 25:1-12; 막 2:19-20; 요 3:29; 고후 11:2; 엡 5:25-27). 신랑과 신부의 비유는 남편 되신 하나님의 신부에 대한 선택과 사랑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요한은 보좌에서 나는 큰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어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의 내용과 동일합니다. “내가 내 성막을 너희 중에 세우리니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하지 아니할 것이며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레 26:11-12). 구약성경에서 장막과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습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의 사귐은 에덴에서 상실되었습니다(창 3:8,24). 하지만 구약의 성막(출 25:8)과 성전(대하 6:18)은 그분의 백성이 이 사귐을 기대하도록 만들었고, 선지자들은 이 사귐을 약속했습니다(겔 40~48장). 마침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서 오신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을 통해 이 사귐이 실현되었습니다(마 1:23; 요 1:14). 새 예루살렘은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구약의 예언과 모형을 성취하는 영광스러운 ‘성전-도성’으로 묘사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친밀한 언약적 관계가 회복됩니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에서 이루어진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제한적이고 한시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에서 성도들은 하나님과 완전하고 영원한 교제를 누릴 것입니다(22:4).

살다 보면 성도들도 많은 눈물을 흘립니다. 기쁨의 눈물도 있지만 고통과 아픔의 눈물도 많이 흘립니다. 인생을 돌아보면 기쁜 일보다는 슬픔이 더 많은 것처럼 여겨집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기도 합니다. 영과 육의 연약함으로 힘들어 할 때도 많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고 하나님보다 자신을 의지하며 살았던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 거하기보다는 죄 가운데 거하기를 더 원했던 우리들의 악한 모습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임재보다는 부재를 경험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성에서는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합니다. 새 예루살렘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선 눈물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성도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망이 없습니다. 사망과 음부를 불 못에 던지기 때문입니다(20:14). 옛 세상에서 사망은 죄의 결과였습니다. 애통하거나 곡할 일도 없으며, 아픔도 사라집니다. 이것들은 모두 처음 것들에 속한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악이 사라지는 새 예루살렘에서 죄뿐만 아니라 죄의 결과인 슬픔과 고통도 모두 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됨을 보여 줍니다.

보좌에 계신 주님이 다시 말씀하십니다.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만물을 새롭게 창조하노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단순히 기존의 만물을 새롭게 만드는 차원이라면 ‘그 만물’이라고 해야 하겠지만 정관사 ‘그’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옛 창조 질서를 가리키지 않으며 이전과 다른 ‘만물을 새로이 만든다’는 새 창조의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면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않을 것입니다(사 65:17). 그러면서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실하고 참되신 증인이신 예수님(3:14)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오직 그분의 말씀으로 만물을 새롭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1:3). 영원히 복이 있습니다.

이긴 자와 불못에 들어가는 자(6-8절)
6절은 ‘또 내게 말씀하시되’라고 하며 5절에 이어 하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을 기록합니다. ‘이루었도다’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최후에 선포하셨던 말씀인“다 이루었다”를 생각나게 합니다(요 19:30). 사용하신 단어는 다르지만 뜻은 같고, 더 풍성하게 이루어집니다. ‘이루었도다’는 완료시제 3인칭 복수형으로 ‘그것들 모두가 성취되었다’라는 뜻입니다. 종말적 상황에서 언급된 점을 미루어 보면 ‘이루었도다’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드디어 완성되었다고 만방에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1:8에서 ‘알파와 오메가’라고 했는데, 20:6에서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고 사용합니다. 그런데 22:13에서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고 하면서 표현이 점점 확대됩니다. “처음과 마지막”은 직역하면 ‘그 시작과 그 끝’입니다. 이는 역사의 주관자로서 세계의 창조와 완성을 마무리하신 분임을 함축적으로 나타냅니다. 주님은 약속하신 대로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약속하셨던 그 생수가 부어지는 것입니다. 계시록 7:17에서 어린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신다고 했는데 그 약속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목마른 자’는 단지 하나님을 갈구하는 자(사 55:1)가 아니라, 죽기까지 어린양을 따른 자입니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6절의 ‘목마른 자’가 7절에서는‘이기는 자’가 됩니다. 하나님은 이기는 자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기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일곱 교회에게 주셨던 약속들이 여기서 성취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이기는 자들’의 것입니다. ‘이기는 자’란 죄의 시험과 유혹을 이기고 세상과 마귀의 유혹과 핍박을 이기는 자를 말합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 5:4). 세상은 악하고 마귀의 시험은 강하고 우리는 약할지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믿는 자마다 세상을 이기고 자신의 죄성을 이기고 마귀를 이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한 고난을 피하고 세상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 비겁하게 하나님을 부인한 자들은 이기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 끝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받으리라’‘주께 속한 것을 유업으로 받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나라를 반드시 상속받습니다.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는 표현은 메시아에 관한 암시인 삼하 7:14을 배경으로 합니다.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사무엘하에서는 ‘아버지’라고 되어 있는데 7절에서는 ‘하나님’으로 바뀌었습니다. 요한은 이러한 변경을 통해서 오직 예수님만이 메시아이시며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을 암시적으로 강조하며 동시에 본 절의 이기는 자들도 그리스도와의 올바른 관계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부자 관계가 이루어짐을 시사합니다.

8절은 7절과는 대조적으로 이기지 못하는 자들의 목록을 열거하면서 그들은 둘째 사망, 곧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진다고 말씀하십니다.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는 직역하면 ‘그들의 몫은 불과 유황으로 타오르는 못에 있다’입니다. 이것은 20:11-15에서 그 행위대로 심판을 받아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들어가게 된 자들의 경우와 동일합니다. 어떤 자들이 불 못에 던져집니까? ‘두려워하는 자들’은 어린양을 끝까지 따름으로써 겪게 되는 고난을 두려워한 나머지 믿음을 저버리는 자들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일반 불신자들을 가리킬 수 있지만,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14:2). ‘흉악한 자들’은 가증스러운 자들로서 영적, 도덕적으로 혐오스러운 죄를 범한 자들입니다. ‘살인자들’은 특히 성도들을 박해하고 죽인 자들을 가리킵니다. ‘음행하는 자들’은 거짓 선지자와 음녀에게 미혹되어 영적, 도덕적 음행을 범한 자들입니다. ‘점술가들’은 우상숭배와 관련해 마법이나 주술을 부리는 자들입니다. ‘거짓말하는 자들’은 특히 교회안의 거짓 사도(2:2) 및 사람들을 미혹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자들입니다. 십자가의 엄청난 희생과 사랑을 무시하고 그것을 거절한 죄입니다. 성도들은 악을 행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믿고 승리함으로 구원에 이르러야 합니다. 잘못된 사상에 미혹되지 않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정리하는 차원에서 성경에 나타난 사망의 종류를 살펴봅니다. 사망은 목숨이 끊어져 숨지거나 죽음의 상태에 이르는 것을 말합니다. 창세기에서는 불순종의 죄로 인한 하나님과의 분리를 뜻하기도 합니다. 구약에서는 죽음에 이르는 것을 ‘열조에게 돌아간다’고 표현합니다. 신약에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이를 수 있음을 말하면서 구원을 위해 반드시 죽은 뒤 생명으로 옮겨가야 함을 강조합니다. 또한 성도의 죽음을 ‘잠잔다’고 표현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에 참예할 것을 기대합니다. 성경에서 표현하는 사망의 종류는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영적 사망은 아담이 범죄할 때 정죄되어 영적으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를 가리킵니다(창 2:16-17; 3:22-24). 모든 사람은 아담의 후손이기에 영적 사망 상태에 있습니다. 육적 사망은 아담의 범죄의 결과로 인해 선악과 언약대로 성도나 불신자 모두 그 영혼과 현세의 몸이 분리됨으로 당하는 육체적 죽음을 가리킵니다(롬 6:23; 히 9:27). 영원한 사망은 영적 사망의 최후 상태로,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를 힘입어 영적 사망의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한 불신자들이 세상 끝날 심판을 받아 영원한 고통과 슬픔에 처하게 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성경은 이를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계 20:6, 14; 21:8).

우리의 자세
이기는 자가 되려면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합니까?
-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해야 합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름답게 단장한 새 예루살렘을 하늘로부터 내려오게 하십니다. 이 세상은 인간이 살기에 가장 알맞게 하나님의 지혜로 설계되고 창조되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죄악 때문에 땅은 엉겅퀴와 가시를 내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 세상의 하늘과 땅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터전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날이 되어 우리가 부활의 몸을 입을 때에는 이 땅과는 전혀 다른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됩니다. 왜냐하면 영화롭게 변한 성도들에게 알맞은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신부가 남편을 위해 단장을 하듯, 하나님은 새로운 영광의 몸을 가진 성도들을 위해 새 예루살렘을 준비하십니다. 성도들은 모든 것이 새롭고 온전한 그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토록 살 것입니다 그곳에는 세상에서 겪는 눈물과 고통과 죽음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곳을 사모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과 언제나 함께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믿음의 조상들이 사모했던 것은 이 땅의 본향이 아니라 더 나은 본향, 즉 하늘에 있는 본향이었습니다(히 11:16) 성도는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지는 날을 사모해야 합니다. 세상의 것에 마음을 두지 말고 하늘의 상급과 처소를 사모하며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경험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의 신앙생활은 새 예루살렘의 리허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녹처럼 하나님과 날마다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살아야 그 천국을 맛볼 수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에서 우리가 경험하게 될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는 이미 우리에게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오늘도 영적 복을 맛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마르지 않는 생수를 날마다 우리에게 주기를 원하십니다. 믿는 자에게 가장 큰 복은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속에서 선한 행실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오시는 날 우리에게 허락하실 완전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소망해야 합니다.
- 고난당하는 자를 위로해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병, 죽음, 실직, 가난, 굶주림, 실패 등으로 인해 위로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도울 때 주의해야 합니다. 욥의 친구들처럼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을 더 고통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욥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진정한 위로의 방법을 몰랐습니다. 우리도 자칫하면 고통당하는 형제나 자매를 제대로 위로하지 못해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위로할 때는 결코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마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말을 많이 하기보다는 침묵하며 울어 주는 것이 위로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때로 고난당하는 사람에게는 옆에 함께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됩니다. 비슷한 경험이 있다면 함께 나누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통을 주신 것도 비슷한 고난을 당한 사람을 도우라는 뜻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위로할 때 천국이 우리 가운데 임합니다. 목장이 고난당한 형제자매들을 위로하거나 도움을 제공하는 좋은 기회를 제공합니다.

나가면서
새로운 것이 도래하면 이전 것은 없어지는 것이 순리입니다. 처음 하늘, 땅, 바다 그리고 그 가운데 있던 죄악이 사라집니다.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십니다. 새 창조의 복된 환경을 누릴 주인공은 바로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불리는 새 예루살렘입니다(21:2, 9-10). 그리스도의 신부는 교회이므로 새 예루살렘은 교회를 상징합니다. 감격스러운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친히 성도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옛 언약 아래서는 성전을 통해 하나님을 제한적으로 만났지만, 이제는 언제든지 함께 계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께 함께 사는 성도들에게는 눈물과 사망과 고통이 사라지고 기쁨과 감사가 충만합니다. 자기 백성과 함께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천국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고 칭하시면서 “이루었도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모든 역사의 처음과 끝, 즉 전부가 되신 창조주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 목적을 다 성취하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모든 자가 이 은혜를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이기는 자’라야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을 상속받습니다. ‘이기는 자’는 모든 시험과 환난을 이기고 믿음을 끝까지 지켜 영적 승리를 쟁취한 자를 의미합니다.

성도들이 겪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롬 8:18). 종말이 있음을 믿고 세상의 박해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 종말론적 신앙입니다. 또한 불 못에 들어가는 자들의 목록은 우리로 하여금 경각심을 불러일으킵니다. 믿음에 행함의 열매가 따르듯이, 불신앙에는 죄악의 열매가 따릅니다. 그런데 그 목록에는 불신자들 못지않게 명목상의 신자들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잃으면 찾게 될 것입니다(마 16:25). 계시록에서 믿음은 죽기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포함합니다. 이것이 두려운 자들은 타협하게 됩니다. 종말론적 신앙생활에 ‘적당히’란 있을 수 없습니다. 불 못에 들어가지 않고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려면 핍박을 이겨내야 합니다. 구원받은 십사만 사천의 특징은 그 입에 거짓말이 없다는 것입니다(14:5). 그리스도인은 또한 거짓을 분별해야 할 뿐만 아니라, 진리를 선포하는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과 함께 임할 새 예루살렘 성을 상속받을 자는 성도들입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 자녀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현재 삶은 미래 삶을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성도는 영광스러운 미래를 소망하며 삶의 모든 영역에서 거룩함을 보여야 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끝까지 지켜 이기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