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론의 심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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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02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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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에는 마음을 빼앗고 혼미케 하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사람들은 돈과 쾌락을 사랑합니다. 눈에 보이는 화려한 것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사탄은 이런 것들이 진정한 행복을 준다며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마치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행동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살려고 합니다. 신자들마저도 이렇게 살고 싶은 유혹에 빠집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본문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대적하는 세력들은 무엇인지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 줍니다.
대접 재앙이 임하는 것을 기점으로 어느덧 계시록도 종말을 향하고 있습니다. 남은 결론 부분은 악의 세력들의 최종적인 멸망과 교회 공동체의 승리와 영광의 메시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바벨론 심판에 대한 기록은 16:19-21에서 나온 일곱째 대접 재앙을 좀 더 자세하게 풀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성령에 이끌려 간 광야에서 붉은빛 짐승을 탄 큰 음녀 바벨론에 대한 환상을 봅니다. 짐승과 음녀의 특징을 묘사한 후, 이 환상에 대한 천사의 설명이 이어집니다.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바벨론이 교만과 음행, 그리고 자기 과시로 가득 차다 보니 철저하게 심판을 받게 됩니다. 바벨론은 로마 제국을 상징합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교회 공동체를 핍박하고 멸절하려는 사탄의 도구였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바벨론에 대한 자세한 소개는 용과 두 짐승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악의 판도를 정확하게 파악하도록 돕습니다. 17장과 18장에서 바벨론의 멸망을 다루고 있는데, 본문은 첫 부분에 해당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음녀와 짐승의 정체를 바로 알고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으로 어린 양을 의지하며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음녀 바벨론(1-5절)
요한은 일곱 대접 재앙에 이어 큰 음녀가 받을 심판에 관한 계시를 받습니다. 일곱 대접을 가진 천사가 다시 등장하는 것은 이 부분이 16장의 대접 재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대접 재앙의 결과 하나님의 심판이 완성됩니다. 음녀가 받을 심판을 보여 준 천사와 어린 양의 신부, 즉 새 예루살렘을 보여 준 천사는(21:9)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입니다. 이는 일곱 대접이 종말론적 심판과 구원의 절정에 해당하는 두 사건으로 이어짐을 암시합니다. 천사는 요한에게 ‘이리로 오라’고 했는데, 장소를 옮기라는 말이 아니라 주의를 집중해서 들으라는 요청입니다. 이는 바벨론의 멸망을 언급한 일곱째 대접 재앙(16:17-21)을 계속해서 설명한다는 예고입니다. 이어지는 ‘많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17:15)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며, ‘큰 음녀’는 ‘바벨론’(17:5,18)을 의인화한 표현입니다. 바벨론이 ‘큰 음녀’가 된 것은 땅의 임금들과 더불어 하나님을 배역하는 행위, 곧 ‘음행’을 자행했기 때문입니다. 음녀 바벨론은 하나님을 떠난 세속적인 문화 혹은 문명의 총체를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음녀는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성도를 미혹시키는 세속적인 악을 총칭합니다. 계시록을 기록할 당시에는 로마라고 할 수 있고, 주님의 재림 때까지 계속될 세속적인 도성(문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음녀가 어떻게 하기에 열국과 백성들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까? 성경은 음녀를 ‘큰’이라는 형용사(17:1; 18:1; 18:2,10,21; 19:1~2)와 함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음녀는 사람들을 거대한 힘을 숭배하게 하는 쪽으로 몰아갑니다. 힘 가진 자들을 미화하고 사람들에게 그들을 따르게 합니다. 인생의 창조 목적은 힘, 권력, 그리고 물질의 우상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의존하여 그분이 공급해 주시는 힘을 통하여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삶의 목적이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힘을 얻는 것이 될 때,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힘으로 살려고 하면서 힘겨운 생존 경쟁을 펼쳐야 합니다. 우리 시대를 보고 있노라면 음녀의 힘이얼마나 강력한 것인지를 피부로 실감하게 됩니다. 로마 제국은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자랑할 만큼 겉으로 보기에 강력하고 안정된 나라였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한 상태였습니다. 땅의 임금들이 음녀와 같이 음행했고, 땅에 사는 자들이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했습니다. 이것은 바벨론이 모든 나라에게 음행으로 진노의 포도주를 먹였다는 천사의 말을 떠올리게 합니다(14:8). 영적이고 도덕적으로 많은 죄를 범한 바벨론으로 인해 다른 나라도 공범이 되었습니다. 바벨론을 가까이하면 그가 범하는 죄를 범할 뿐 아니라 그가 받을 재앙도 함께 받게 됩니다(18:4). 그들의 멸망은 이미 예고된 것이며 자신들이 심은 대로 거둔 것입니다.
요한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광야에서 이루어지는 환상을 봅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보호를 상징할 때도 있지만(12:6, 14), 여기에서는 악하고 음란한 짐승이 거하는 사탄의 활동 영역을 의미합니다. 음녀는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인 붉은 짐승을 타고 있는데, ‘타다’가 현재분사로 사용되어 큰 음녀가 권력을 내내 즐기는 상태를 묘사합니다. 짐승의 몸에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합니다. 붉은 빛 짐승은 13장에 등장한 바다에서 나온 짐승입니다. 용과 바다에서 나온 짐승 모두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입니다(12:3; 13:1). 짐승의 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하듯이, 바다에서 나온 짐승의 머리들에는 신성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었습니다(13:1). 짐승은 하나님을 비방하고 자신을 신격화하는 악의 세력을 가리킵니다. 용에게 권세를 받은 짐승은(13:4) 용의 특성을 닮았습니다.
음녀는 자줏빛과 붉은빛 옷을 입고 있는데, 붉은색은 음녀가 타고 있는 짐승의 색이기도 합니다. 고대에 자주색과 붉은색은 염색 비용이 많이 들어서 부자들만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음녀가 꾸민 금과 보석과 진주 역시 부를 나타냅니다. 음녀가 들고 있는 금잔은 가증한 것과 음행의 더러운 것들로 가득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21장에서 언급되는 보석과 진주, 그리고 정금으로 장식한 새 예루살렘과 비교됩니다. 어린 양의 신부, 곧 성도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있습니다(19:8). 음녀가 약속하는 쾌락은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추한 것입니다. 바벨론이 제공하는 사치는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부정한 방법으로 얻고 누리는 것입니다. 음녀의 이런 음행은 단순히 남녀 간의 성관계를 맺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신해 이 세상의 것들을 더 사랑하게 하고 예배하게 하는 모든 것, 즉 우상숭배를 의미합니다. 음녀의 유혹을 받은 세상이 지극히 찰나적이고 육욕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삶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보다는 세상의 쾌락을 더 사랑하게 합니다. 자신들이 추구하는 권력과 성공의 신(우리 시대의 바알 신)에게 바쳐야 할 시간 때문에 진정 경배받기에 합당하신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렇게 그들이 계속적으로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게 되면 하나님도 그들을 욕망의 종으로 정욕대로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계시록에서 이마에 있는 표나 이름은 정체성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이마에 인침을 받습니다(7:3; 9:4).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쓰여 있고(22:4), 구원을 받은 십사만 사천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쓰여 있습니다(14:1). 그런데 짐승을 따르는 자들도 이마나 오른손에 표를 받습니다(13:16; 14:9; 20:4). 음녀의 이마에는 ‘비밀’이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비밀은 마지막 때가 되면 드러나는 것으로 음녀의 성격을 잘 묘사합니다. 비밀이 이름과 동격으로 사용되므로 ‘비밀스런 이름’혹은 ‘이름 곧 비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음녀는 온 세상을 음란으로 물들이는 큰 바벨론이며,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임이 알려지게 됩니다.
여자와 짐승의 비밀(6-8절)
요한은 성도들의 피와 예수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 그 여자를 보고 놀랍게 여깁니다. 그 앞에서 두려움을 느꼈을 뿐 아니라 환상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이에 천사는 요한에게 왜 놀라느냐고 반문하면서, 짐승과 음녀의 비밀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짐승과 음녀의 실체와 그들의 비극적 결말을 알고 나면 놀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먼저 그 짐승에 대해 설명하는데,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1:8)이신 하나님과 대조를 이룹니다. 11절에서도 ‘전에 있었다가 지금 없어진 짐승’으로 묘사됩니다. 13장에서 짐승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놀라운 능력을 가진 것으로 묘사됩니다. 짐승에 대한 해석이 다른 이유는 13장은 짐승의 강함이, 17장은 짐승이 받을 심판이 강조되기 때문입니다. 당시 로마에는 황제 숭배뿐 아니라 우상 숭배가 횡행했습니다. 로마 황제나 각종 우상들은 결코 영원하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과 비길 수 없는 존재인데도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 곧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자들은 그들을 보고 놀라며 숭배합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속지 말아야 합니다. 사탄의 운명은 이미 정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짐승과 우리 주님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는 마지막 결국에 있습니다. 무저갱에서 올라온 짐승은 머지않아 멸망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마귀도 자신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12:12). 그런데 어린 양은 이기는 자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3:5). 창세부터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은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자들로서(17:14), 하나님의 섭리와 보호 가운데 짐승의 박해와 미혹을 이기게 됩니다.
일곱 머리와 열 뿔의 의미(9-12절)
짐승의 표를 분별하려면 지혜가 필요하듯(13:18), 일곱 머리와 열 뿔의 상징적 의미를 이해하려면 ‘지혜로운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천사가 말합니다. 이 지혜는 신적인 기원을 가진 지혜입니다. 지혜 있는 자는 짐승과 그의 거짓된 가르침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짐승의 일곱 머리는 음녀가 앉아 있는 일곱 산입니다. 이 표현이 음녀의 역사적 실체를 암시한다고 보기도 합니다. 로마가 일곱 언덕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를 심하게 박해한 로마는 적그리스도의 세력을 상징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계시록에서 숫자들이 빈번하게 상징적으로 사용되므로, 일곱 산이 반드시 로마에 있는 일곱 산을 가리킨다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일곱 머리는 또한 일곱 왕을 상징합니다. 다섯 왕은 망했고, 한 왕은 지금 있고, 다른 왕은 미래에 와서 얼마 동안 있다가 사라진다고 합니다. 지금 있는 여섯째 왕이 통치하던 시기에 계시록이 기록되었다는 전제 아래, 일곱 왕의 정체를 역사적으로 규명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있었습니다. 일곱 왕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강력한 악의 세력으로 보기도 합니다. 완벽을 상징하는 숫자 7은 계시록에 자주 등장합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완벽해 보이는 악의 세력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여덟째 왕은 본래 일곱 왕 중의 하나가 다시 등장한 것으로, 일곱 뿔을 가진 짐승 자신입니다. 이 여덟째 왕을 ‘전에 있었다가 지금 없어진 짐승’이라고 묘사함으로써 일곱 왕에 속했다가 여덟 번째로 등장하게 되는 정황과 정확하게 조화시킵니다. 여덟째 왕이 상징하는 적그리스도 세력은 전에 나타났던 악보다 더 강한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중요한 것은 여덟째 왕의 최후는 멸망이라는 점입니다.
천사는 열 뿔을 나라를 얻지 못한 열 왕으로 해석합니다. 여기서 열 왕은 로마 황제나, 동방으로부터 오는 왕(16:12)들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로마 황제는 11절에 언급된 일곱 머리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더 나아가 열 왕이 로마의 황제들과 달리 나라를 얻지 못했다는 점도 열 뿔이 로마 황제가 아니라는 점을 드러냅니다. 일반적으로 ‘열’은 상징적 숫자로서 완전함을 의미하며 ‘뿔’은 힘과 권세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열 뿔은 완전한 권세를 가진 무언가를 가리킵니다. 아마 ‘열 뿔’은 세상 왕들이 가진 큰 권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왕들은 자신들의 독자적인 힘으로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짐승의 손에 붙들려 통치하다가 짐승의 멸망과 함께 사라질 것입니다.
어린 양의 승리(13-14절)
일시적인 권세를 받은 열 왕은 ‘한 뜻’으로 자기들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며 충성을 다합니다. 이들의 강력한 연합은 어린 양을 대적해 종말적 전쟁을 하려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큰 음녀와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는 무시무시한 짐승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지만, 그들은 결코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어린 양께서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힘과 능력은 진리 안에 있습니다. 어린 양 예수님은 진리이십니다. 따라서 종말론적 전쟁의 승리는 어린 양의 것입니다. 그리고 어린 양을 따르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 또한 이기게 될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악이 어떻게 망하는지를 요한이 설명합니다. “이 열 뿔과 짐승은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의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16절을 보면 악은 자중지란 속에 스스로 망하게 됩니다.
우리의 자세
- 미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천사는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보여 줍니다. 그 과정에서 음녀의 정체가 밝히 드러납니다. 음녀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는 붉은 빛의 짐승을 탔습니다. 그녀는 자줏빛과 붉은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치장했으며 손에는 금잔을 가졌는데 안에는 가증한 물건들과 음행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것이 큰 음녀, 바로 사탄의 정체입니다. 겉모습은 그럴듯하게 속일 수 있지만 본질은 감출 수 없습니다. 성도는 화려한 외양에 미혹되거나 속아서는 안 됩니다. 사탄은 그런 것들이 진정한 행복을 준다면서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이 시대의 풍조는 거짓 진리로 우리를 속이려고 합니다. 우리는 세상 너머에 있는 더럽고 추한 본질과 악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려면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셔서, 죄와 유혹에서 구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채우며 음녀의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 어린 양의 승리를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은 강력하고 지혜로워서 우리를 크게 위협합니다. 짐승과 음녀는 스스로를 왕으로 높이며 세상을 지배하려 하지만 그들의 지배는 제한적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위협과 유혹이 거세질수록 하늘의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짐승은 열 뿔을 동원해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와 싸우려 하지만 만주의 주요,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성도들은 어린 양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온 세상의 구주요, 만국을 통치할 권세를 받으신 전능한 분이심을 믿기에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어린 양과 동행하는 성도들은 그리스도로 인해 영적 전쟁에서 궁극적으로 이길 것을 믿어야 합니다.
- 진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마귀는 본질상 거짓을 말하는 존재입니다. 마귀는 아담과 하와를 유혹할 때도 거짓말을 했습니다. 광명의 천사로 위장해 사람들에게 접근하지만 입과 행동, 그리고 마음에는 진실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진실 그자체이십니다. 성도들은 음녀처럼 화려한 옷이 아니라 진실함을 나타내는 흰옷을 입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닮은 진실한 사람들입니다. 연약하기는 하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다른 사람을 대합니다. 마귀는 예수님과 함께하는 진실한 사람들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진실함을 포기하면 그것은 승리를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진리이신 하나님을 믿고,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매사에 진실한 말과 행동이 성도의 무기입니다. 이익을 위해서, 눈앞의 위험을 모면하기 위해서, 높아지기 위해서 진실함을 버리고 거짓되게 행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성도들은 음란하고 더러운 세상 문화 속에서 거룩하고 순결한 어린 양의 신부임을 기억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오직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바른 행실로 단장해야 합니다.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더욱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겉모양보다 속사람을 아름답게 가꾸는 진실한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끝까지 정결한 세마포를 지키는 사람들이 복이 있습니다.
나가면서
큰 음녀에 대한 묘사는 1세기 말 로마 제국에 있던 교회가 얼마나 힘겨운 신앙의 싸움을 했는지를 가능케 합니다. 강력한 권세와 화려한 장식을 한 큰 음녀는 교회 공동체의 신앙을 흔들어 놓았을 것입니다. 오늘도 세상은 짐승이나 음녀와 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위협하고 유혹합니다. 음녀의 실체는 음란과 더러움입니다. 게다가 음녀는 하나님의 종들을 박해하는 악의 세력입니다. 음녀가 화려하게 치장하고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로마는 거대한 부와 사치를 통해 사람들을 미혹했습니다. 로마는 도덕적 죄악뿐 아니라, 황제 숭배와 기독교 박해와 같은 영적 죄악을 범한 도시였습니다. 이러한 죄악은 어느 시대에나 있을 수 있습니다. 모양을 달리해도 이러한 죄의 배후에는 사탄이 있습니다. 붉은 짐승을 탄 ‘큰 음녀’바벨론은 전 세계를 지배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체제와 문명을 구축해갑니다. 창조주의 이름을 모독하고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며 예수님을 전하는 성도들을 위협하고 박해합니다. 야심과 야욕에 찬 열국의 왕들과 거민들은 큰 음녀 바벨론의 ‘거대함과 화려함과 힘’에 매료되어 그를 맹신하고 추종합니다. 바벨론에서 속히 나오지 않으면 달콤한 죄를 잠시 누릴지 몰라도, 바벨론이 받을 재앙들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에서 불의한 즐거움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죄악의 도시 소돔에 살던 롯은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고통을 당했습니다(벧후 2:7).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사회의 문화나 가치관도 하나님을 거역하며 모독하는 경향을 강하게 보입니다. 그 뿌리에는 돈과 권력과 쾌락을 숭상하는 우상 숭배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기서 나와라’라고 말씀하시는 곳이 있습니까? 성경은 우상숭배를 행한 사람들의 최후가 어떠했는지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마지막 날 짐승을 왕으로 섬긴 사람들은 짐승과 함께 심판을 당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정신과 문화와 질서 속에 감추어진 악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만왕의 왕이신 어린 양 예수님과 동행할 때 모든 위협과 유혹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는 연약한 존재이지만 주님이 함께 하시면 승리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예수님과 함께하기로 결단하며 형통한 삶을 살다가 담대하게 주님 앞에 서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