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제자들의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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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05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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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마 5:13-16


튀르키예 동남부와 시리아 서북부 국경 지대를 강타한 강진이 발생한지 한 달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크고 작은 여진이 계속되고 많은 이재민들이 여전히 텐트 생활을 하는 등 복구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튀르키예 정부와 유엔이 5일(현지 시각)까지 집계한 지진 사망자는 튀르키예 4만5089명, 시리아 5914명 등 5만1003명에 달합니다. 부상자는 12만 명 이상, 이재민은 20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됩니다. 이재민들은 전기, 수도, 난방, 식료품, 의료 서비스 등이 크게 부족해 많은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동안 여러 나라에서 구조팀을 보냈고 지진 피해를 돕기 위한 구호활동이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서도 몇몇 뜻있는 분들이 주체가 되어 구호기금 마련을 위한 음악예배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지진이나 큰 사건을 당하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하는 질문을 많이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3:4-5에서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현재 상황에 비추어 본다면 죽은 사람들이 모슬렘이었기 때문이라거나 죽은 자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죄를 더 많이 지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고 당한 사람들을 함부로 정죄하지 말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늘 회개하며 겸허한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 기도나 설교 중에 많이 언급되는 문구입니다. 여기서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 하는 것은 세상이 주목할 만한 업적을 이루었거나 도덕적으로 뛰어난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불신자들도 그들의 업적이나 도덕적인 행위를 통하여 얼마든지‘세상의 소금’이나‘세상의 빛’으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도덕과 윤리가 기준이 된다면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 도리어‘세상의 어두움’될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천국 백성이 된 자들은 행위와 상관없이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말씀합니다.

본문을 잘 들여다보면 ‘너희는 앞으로 열심히 노력해서 세상의 소금이 되라,’‘제자훈련 과정을 이수한 후에 세상의 빛이 되라,’‘이 교회는 산 위에 있는 도성이 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그 목표에 이르도록 힘써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너희가 나를 잘 따르면 앞으로 소금으로, 빛으로, 또는 산위의 도성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지도 않으십니다. 너희는 이미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요, 산 위의 도성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너희’는 일반적인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 즉 예수님의 제자들을 지칭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세상의 소금,’‘세상의 빛,’‘산위의 도성’입니다. 이 세 개의 그림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 즉 교회의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성도들이 세상의 소금과 빛의 사명을 잘 감당하여 누구나 볼 수 있는 산 위의 도성이 될 때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세 가지 그림에 나타난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을 각자의 삶과 사역에 적용하면서 주님이 보시기에 풍성한 열매를 거두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은 산상수훈의 일부입니다. 산상수훈은 제자들이 실천하도록 주어진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 들음은 깨달음이나 행함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산상설교의 삶을 실천하는 사람이 말씀을 듣고 깨달은 자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 백성 또는 제자들의 신분을 언급하며 신분에 걸맞게 살라고 촉구하십니다. 소금의 맛과 빛의 착한 행실은 ‘더 나은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소금
예수님은 천국 백성으로서의 존재와 삶을 '세상의 소금'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하십니다. 이 말씀은 세상이 타락했고 썩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세상의 부패와 타락을 인정할 뿐 아니라 막아야 합니다. 요리에 빠질 수 없는 조미료인 소금은 맛을 낼 뿐 아니라 부패를 방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제자들은 이 세상에서 꼭 필요한 존재요 사명을 가진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 짠맛을 냅니다
예수님은 먼저 ‘짠 맛’을 언급하십니다. 소금이 항상 짠맛을 유지하듯이 가치관이 흔들리는 무질서의 세상에서 성도들은 진리에 굳게 선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게 되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엌에서 사용하는 소금이 오래 보관한다고 맛이 달라지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보통 소금은 염전에서 바닷물을 증발시켜 만들지만 유대 나라의 소금은 땅 속에서 얻어지므로 소금이 흙과 섞여 있습니다. 얼핏 보아서는 소금과 흙을 구별할 수 없으므로 짠맛이 없으면 흙으로 취급되어 버림을 받고 사람의 발에 밟히게 됩니다. 버려진 소금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밭에서 거름으로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잃게 된다”는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어리석게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제자는 어리석다는 것입니다(7:26). 짠맛이 제자들의 특징인데, 짠맛을 잃으면 제자로서의 존재 의미를 잃을 뿐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짓밟히게 되니 주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게 됩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덥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덥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 3:15-16)라고 하시면서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주님은 미적지근한 신앙, 짠맛을 내지 못하며 세상과 구별되지 않은 사람을 싫어하십니다. 소금이 짠맛을 내듯이 성도들이 세상에서 사랑을 실천하며 도우며 살면서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유익을 주면서 살맛나는 세상이 되게 해야 합니다.
- 부패를 방지합니다
성경은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롬 12:2).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약 4:4)라고 경고합니다. 이 세상은 그대로 두면 부패하고 더러워집니다. 야채나 생선을 저릴 때 소금을 뿌려 부패를 방지하듯이 성도들은 세상의 소금 역할을 해야 합니다. 비록 악하고 음란한 세상에 살지만 경건한 삶, 진실한 삶, 의로운 삶을 통하여 본을 보이며 세상의 부패를 막는 방부제 역할을 해야 합니다.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과 짝을 이루어 말씀하신 것이 '세상의 빛'입니다. 이 말씀은 세상이 어둠 가운데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하고 기술이 개발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은 여전히 어두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교회의 사명은 세상과 구별되어 세상에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사 60:1). 이사야가 말세에 만민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나타날 것을 예언하였는데 예수님과 그를 믿는 자들을 통하여 그 예언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예수님 자신이 빛이시기에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빛이신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을 받아 어두운 세상을 비춥니다. 천국백성으로서의 신앙이나 가치관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날 때만이 비로소 세상 사람들이 깨닫고 느끼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평소에 하는 말이나 행동, 대인관계에서 드러난 우리의 모습을 지켜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예수님이 흑암에 앉은 백성에게 빛이 되신 것처럼 자신의 삶에서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4:16).

산위의 도성
구약에서는“산 위에 있는 동네”가 예루살렘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사 2:3). “말일에 이르러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미 4:1). 예수님이 교회를 산 위의 동네로 비유하신 이유는 개인적으로만 빛을 발하는 것보다 믿는 사람들이 함께 빛을 발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기 때문입니다. 산 위의 동네가 감추어질 수 없듯이 세상에서 주님의 빛을 환하게 비추는 교회는 세상에서 관심과 주목의 대상이 됩니다. 교회가 모든 세상에 본을 보이는 하나님의 도성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빛을 비춤으로 온 세상이 칭송하며 그 도성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 합니다.

제자들의 사명
하나님의 구원을 이 땅에 증거 하는 것은 원래 이스라엘에게 맡겨진 역할이었으나 이스라엘이 제사장의 노릇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니 하나님께서 촛대를 옮기셨습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는 성도들을 통하여 이 사역이 이루어집니다. 빛은 성도의 착한 행실을 말합니다. 문맥을 보면, 착한 행실이란 산상 수훈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착한 행실’은 또한 하나님을 믿는 신실한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이웃 사랑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우리의 행실을 보는 곳은 교회당이 아니라 그들과 접촉하는 삶의 현장입니다. 착한 행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는 삶 자체를 의미합니다. 교회에 나오라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다운 모습을 삶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행 2:22-47에 보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실천하는 공동체의 모습이 있습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그 결과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하셨다고 합니다. 칭송을 받는 공동체가 바로 산 위에 세운 동네 노릇을 하는 교회를 가리킵니다. ‘영광을 돌리다’라는 말로 번역된 말은 ‘분명히 보이거나 드러나게 하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의롭게 삶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빛을 비추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그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여기 나온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라”는 말씀과 6:1-6에 나오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과 서로 모순이 된다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두 구절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선행을 통해 누가 영광을 받는가의 문제입니다. 전자는 하나님께, 후자는 자기 자신에게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의 빛을 비치게 하라. 빛을 비치라는 것은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제자도의 한 부분입니다. 믿는 자들이 죄악이나 육의 욕심을 버리고 거룩한 삶, 깨끗하고 양심적인 삶,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모습이 세상에 빛과 같이 비칩니다. 그럴 때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주목하게 됩니다.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소망이 없지만 성도들의 삶을 보니 무엇인가 자기들과 다른 모습, 무엇인가 활기가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 같습니다. 성도들의 의로운 행위를 보고 성도들이 믿는 하나님을 자기들도 믿고 싶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순종하는 자들이 의롭고 사랑이 넘치고 정직하고 화목하게 살면서 산 위에 세워진 동네 노릇을 하게 될 때 선포된 복음이 설득력을 가지고 되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복음을 믿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등불을 켜서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됫박으로 덮어서 감추는 사람은 없습니다. 등불은 등경 위에 둘 때 비로소 그 빛이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비춥니다. ‘말 아래 둔다’는 것은 죄악이나 욕심에 의하여 빛이 발하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그들이 미치는 영향은 숨겨지거나 은밀하게 두어서는 안 되고 분명히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물론 온 우주에 가득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통해 영광을 받기 원하십니다. 그 영광이란 바로 세상 모든 사람이 여호와를 인정하는 것입니다(합 2:14).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이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입니다.

우리의 자세: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빛과 소금은 성도의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빛과 소금이라 말하지만 성경을 보니 순서가 있습니다. 무엇이 먼저입니까? 교회가 먼저 세상의 '소금'으로서 세상의 부패를 막고, 상처를 치유하며, 세상을 살맛나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착한 행실들’로 ‘빛’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올바로 선포하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또는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 이웃 사랑의 동기가 되며,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 사랑의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잘 보여준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이 땅에 오셨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이웃을 향한 이기심 없는 사랑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마태복음 22:39에 의하면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레위기 19:18을 기초로 합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이웃은 유대인을 말합니다. 레위기 19:33-34에는 이웃의 범위가 확대됩니다. 이웃 사람은 단지 유대인 뿐 아니라 이스라엘 땅에 거하는 이방인들을 향해서도 열려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하나님의 백성과 다른 사람들을 구별하여 하나님의 백성만을 사랑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유대인들에게 사마리아 인과 같이 사람을 구별하지 말고 모든 사람의 이웃이 되라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비유의 초점은 강도를 만난 사람이 아니라 그에게 사람들이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지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보고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하였던 이 사마리아인이야말로 진정한 이웃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 우리의 이웃이란 신앙, 사회적인 배경과 상관없이 곤경을 당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이며 이웃 사랑은 그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이웃이 되려면 이웃을 보고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서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필요를 다 해결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최소한도 어느 누군가에 필요한 봉사의 일을 할 수는 있습니다. 때로는 함께 있어만 주는 것으로도 커다란 위로와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이웃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찾아감으로 만들어집니다. 사랑을 베풀 때 그로 인하여 관계가 만들어지고 이웃이 됩니다. 이웃이란 적극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사랑을 베푸는 자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튀르키예와 시리아 지진 피해자들을 돕기 위한 기금을 마련하려는 것도 이웃 사랑의 일환입니다.

나가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고 말씀합니다. 천국의 복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세상의 썩어질 것들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세상에 빛을 비추어 진정한 복된 길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의 빛이요 진리와 생명의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는 예수님을 본받아 예수님의 빛을 세상에 비추어 주는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세상이 부패하게 되는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맛을 잃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소금이 짠맛을 내고 등불이 주위를 밝히듯이 성도가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빛으로서의 삶을 살 때 갈 길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이정표가 되고 어둠으로 인해 불안과 절망을 느끼는 이들에게는 소망이 됩니다. 선한 행실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합니다. 온 교우들이 성령으로 충만한 가운데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잘 감당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하는데 앞장을 서시기를 바랍니다. 악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팔로마 한인교회가 산 위의 도성 역할을 잘 감당하며 예수님의 흔적을 지닌 교회로 지어지는데 힘을 합쳐 동참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