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일곱 인 재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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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12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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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계 6:1-17


앞으로 몇 주 동안 다루게 될 7인 재앙, 7나팔 재앙, 7대접 재앙은 계시록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 중의 하나입니다. 계시록 6장에서 그동안 인봉되었던 두루마리가 열리게 되면서 7가지 인 재앙을 필두로 7나팔 재앙과 7대접 재앙으로 이어지는데 갈수록 재앙의 정도가 심해집니다. 7재앙 시리즈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전체로서, 7번째 재앙이 열릴 때 다른 재앙이 나오는 구조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8:2을 보면, 일곱째 인을 뗄 때 그에 상응하는 재앙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불면서 바로 일곱 나팔 재앙으로 이어집니다. 마찬가지로 15:1을 보면, 일곱째 나팔을 불면서 일곱 대접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재앙이 이미 일어난 것인지 주님의 재림 직전에 있을 것인지 아니면 재림 전에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또한 재앙의 내용을 어디까지 문자적으로 보아야 하고 어디까지 상징적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어린양이 일곱 인을 떼신다는 것입니다. 어린양이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재앙을 주관하십니다.

6장은 5장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인 ‘누가 두루마리의 인을 뗄 것인가’에 대한 답을 제공합니다. 두루마리의 인을 떼실 수 있는 권한을 가지신 예수님이 차례로 인을 떼십니다. 6장은 주님의 재림에 앞서 있을 환난에 대해 언급하는데, 이는 마태복음 24장에 언급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반영한 것으로서 임박한 종말을 알리는 큰 징조가 됩니다. 예수님은 환난 때의 상황을 재난의 시작(마 24:8), 큰 환난(마 24:21), 환난 후(마 24:29)라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장과 계시록 6장의 상황을 비교하면, 첫째 인부터 다섯째 인까지의 재앙은 재난의 시작 부분에 해당하며, 이어지는 여섯째 인을 뗄 때에 일어나는 재앙은 천체의 변동으로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환난 후의 상황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계시록 6장의 사건은 1:19에서 구분된 대로‘장차 될 일’에 대한 사건을 다룹니다. 인이 하나씩 떼어질 때마다 벌어지는 재앙에 대한 묘사를 보면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6장이 장차 임할 재앙을 선언하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참된 소망에 관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전한 그리스도의 계시를 잘 깨달아 영적 지혜와 믿음과 능력을 소유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담대하게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인: 미혹(1-2절)
1절의 “내가 보매”를 직역하면 ‘그리고 내가 보았다’입니다. 접속사 ‘그리고’는 5장과 6장을 이어주며, 연속적인 사건으로 읽도록 합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곱 인을 떼시는데, 처음 네 인을 떼실 때는 말을 탄 사람이 나와 재앙을 집행합니다. 옛날 전쟁에서 말은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첫째 인부터 넷째 인을 뗄 때까지 나타나는 재앙은 전쟁과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네 생물 가운데 하나가 ‘오라’가 외칩니다. 이 계시의 배경은 스가랴서입니다(1:8~11; 6:1-8). 스가랴서와 본문의 공통점은 네 마리 말입니다. 네 마리의 말들을 탄 자들은 이 땅을 정탐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는 이방 민족을 심판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슥 6:5-8). 우렛소리같이 말한다는 것은 천하를 울리는 위엄 있는 소리로 하나님의 심판을 엄숙하게 선포한다는 것입니다. 흰말을 탄 자는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합니다. 흰말 탄자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백마를 타고 재림하시는 장면을 묘사한 19장을 근거로(19:11) 흰말 탄 자를 예수님으로 보는 해석이 있습니다. 그런데 6장의 흰말 탄 자는 활을 사용하지만, 19장의 백마를 타신 예수님은 입에서 나오는 예리한 검을 사용하십니다(19:15). 흰말 탄 자는 단 하나의 면류관을 받지만, 백마를 타신 예수님은 많은 관들을 쓰심으로(19:12) 모든 악의 세력을 능가하는 주권을 가지셨음을 보여줍니다. 흰말 탄 자는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지만, 백마를 타신 예수님은 심판하시며 승리하십니다(19:11). 따라서 그 해석은 문제가 있습니다. 인을 떼신 어린양이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오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흰말을 타고 나가시는 것이 어색합니다. 어린양은 일곱 인의 재앙을 집행하는 자라기보다는 주관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흰말을 탄 자는 계속 이겨야 직성이 풀리는 세상의 강력한 정복자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24:4-14을 보면 예수님께서 세상 종말의 징조에 대해 말씀하실 때, 거짓 그리스도의 미혹, 난리와 기근과 지진, 박해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언급하신 것이 거짓 그리스도에게 미혹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맥락에서 볼 때 흰말을 탄 자를 그리스도를 흉내 내고 대적하는 적그리스도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역사적으로 볼 때 파르티아 군대는 강력한 기마병을 활용해 50-70년대 로마제국의 동부를 약탈했습니다. 무적을 자랑하던 로마군을 위협한 파르티아 기마병의 민첩한 움직임에 대해 로마사람들은 큰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이러한 이미지가 흰말 탄 자를 묘사하는데 기여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요한은 승리의 면류관을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흰말 탄 자의 활약은 욥기에 나오는 사탄과 같이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범위까지만 가능합니다.

둘째 인: 전쟁(3-4)
두 번째 인 역시 첫째 인이 떼어질 때와 동일한 유형을 보입니다. 어린양이 둘째 인을 떼시자 둘째 생물이 ‘오라’고 외치니까 이번에는 붉은 말이 나옵니다. 붉은 색은 전쟁을 상징합니다. 4절 하반부에서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에 사용된 동사는 신적 수동태입니다. 이 피 흘림의 역사도 하나님의 섭리 아래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땅에서 화평을 제하라고 하십니다. 전쟁의 상황이 ‘서로 죽이게 하고’라는 말로 더 구체적으로 묘사됩니다. 실행에 즉시 옮기라는 의미로 붉은 말에 탄 자는 ‘큰 칼’을 받습니다. 전쟁과 살육은 예수님이 종말에 나타날 징조로 이미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라가 나라를, 민족이 민족을 대적하며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마지막 때가 가까웠음을 보여 주는 증거입니다(마 24:7).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전쟁을 허용하시는 이유는 인간의 죄를 심판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미래에 닥칠 일들을 인해 두려움을 갖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쟁을 포함한 모든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개인의 종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언제 죽음이 찾아올지 알 수 없지만 삶을 주관하시는 주님께 맡길 때 주님 안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셋째 인: 기근(5-6절)
어린양이 셋째 인을 떼실 때 셋째 생물이 ‘오라’라고 외치자 이번에는 검은 말을 탄 자가 등장합니다. 검은 색은 슬픔이나 죽음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말세의 징조를 말씀하시면서 지진과 기근이 임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마 24:7). 기근과 전쟁은 함께 있기 마련입니다. 첫째와 둘째가 활과 칼을 가졌지만 이번에는 저울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기근 상황의 심각성을 드러내는 장치입니다. ‘네 생물 사이’에서 나는 소리는 앞의 두 인 심판의 경우에서 찾아 볼 수 없는 표현입니다. 네 생물이 있던 곳이 보좌 주위와 가운데(4:6)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으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전쟁 때문에 생긴 참담한 결과가 기근입니다. 그 기근으로 엄청난 식량난이 발생합니다.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라는 말은 이 재앙의 성격을 보여 줍니다. ‘되’로 번역된 ‘코이닉스’는 곡물을 재는 단위로, 1리터를 조금 넘는 양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일꾼이 하루 종일 일하고 받는 품삯입니다. 그런데 이 한 데나리온의 돈을 가지고 고작 밀 한 되, 아니면 보리 석 되를 살 수 있을 뿐입니다. 하루 번 돈으로 가족이 하루 먹을 양식조차 살 수 없을 정도가 됩니다. 평상시에는 한 데나리온으로 밀 열 되를 살 수 있는데 한 되밖에 살수 없다는 것은 기근으로 인해 곡물 가격이 폭등했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보리는 보통 가난한 자들이 먹었습니다(요 6:9). 한 데나리온으로 한 가족이 하루 식사를 해결하려면 밀보다 양이 많은 보리를 먹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포도주와 감람유는 해치지 말라’는 명령에서 볼 수 있듯이 여분의 식량이 존재함을 암시합니다. 재앙은 있으나 아직은 소망이 있습니다. 이 재앙이 엄중한 것이기는 하지만 아직은 하나님이 제한하시는 재앙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넷째 인: 사망(7-8절)
어린양이 넷째 인을 떼실 때, 넷째 생물이 ‘오라’하니 청황색 말이 등장했습니다. 그 말에 탄 사람의 이름은 사망이고, 음부가 그 뒤를 따릅니다. ‘음부’는 죄인들이 최종 심판을 받기 전까지 영으로 갇혀 있는 구치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사망과 음부는 한 짝으로 붙어 다니는 단어입니다. 그들이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칼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 죽였습니다. 이는 겔 14:21에 열거된 네 가지 재앙을 배경으로 합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내가 나의 네 가지 중한 벌 곧 칼과 기근과 사나운 짐승과 전염병을 예루살렘에 함께 내려 사람과 짐승을 그 중에서 끊으리니 그 해가 더욱 심하지 아니하겠느냐”전쟁이 일어나고 경제적으로 궁핍하면 목숨이 위협을 받습니다. ‘검’은 ‘전쟁’을 상징하고, ‘흉년’은 ‘기근’을 말합니다. ‘사망’은 죽음의 특수한 형태인 ‘전염병’을 말하며(2:23, 겔 14:21), ‘짐승으로 인한 죽음’은 전쟁 이후에 나타난 황폐로 인해서 일어나는 사망을 의미합니다. ‘권세를 얻어’라는 표현은 사망과 음부의 권세가 땅의 사분의 일을 통제하는 막강한 것이라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시사해줍니다. 심판의 범위가 정해져 있다는 말은 모든 피조 세계를 다 멸절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심판하시는 중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진멸할 심판의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은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그 권세를 사용하시기를 스스로 제한하십니다. 지금이야말로 죄인들이 회개하고 믿음을 갖기를 기대하시며 기다리시는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은혜의 때입니다.

다섯째 인: 순교자들의 호소(9-11절)
요한은 어린양이 다섯째 인을 떼실 때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주님을 위해 바쳐진 생명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그 자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됩니다. 순교자들은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13:5).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18:24)로서 믿음을 지키다가 죽임을 당한 자들을 가리킴과 동시에 종말에 핍박을 당해서 죽게 될 순교자들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계시록에서는 ‘땅에 거하는 자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3:10; 11:10; 13:12; 14:6). 즉, 순교자들을 무고하게 죽인 자들을 가리킵니다. 순교자들은 하나님을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로 부르면서 자신들의 생명을 빼앗은 악인들을 심판하셔서 자신들의 피를 갚아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순교자들의 이러한 호소는 단순히 개인적 복수의 차원을 넘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원수로 행한 악인들을 하나님께서 속히 공의로 심판해 주시기를 탄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속히 시행해 주실 것을 구하는 순교자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십니다. 계시록에서 흰색은 순결과 더불어 승리를 상징합니다. 순교자들이 받은 흰 두루마기는 그들이 옳고 그들을 죽인 자들이 옳지 않음을 입증해 줍니다. 주 안에서 죽은 자들, 곧 순교자들이 복이 있는 이유는 수고를 벗어나 쉴 것이기 때문입니다(14:13). 천상의 순교자들은 다른 순교자들의 수가 찰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종말이 완성되는 데 필요한 조건은 순교자의 수가 차는 것입니다. 반면에 마태복음에 따르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해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끝이 옵니다. 그렇다고 계시록과 마태복음이 전혀 다른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린양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이들에게 증언과 순교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은 고난과 죽음을 각오하고 예수님처럼 충성된 증인(1:5)으로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한 순교적인 삶이 제단 아래에 죽임 당한 영혼들의 수를 채우는 과정입니다. 그것이 밑거름이 되어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됩니다.

여섯째 인: 천재지변(12-17절)
어린양이 여섯째 인을 떼실 때, 땅에는 큰 지진이 나고(겔 38:19-20) 해는 빛을 잃어 검게 변하고, 달은 피같이 붉게 변합니다. 하늘의 별들이 땅에 떨어지고, 하늘이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사 34:4), 산과 섬들이 제자리에서 옮겨지는 광경이 보입니다. 예수님도 비슷한 징조를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마 24:29).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세상은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흔들어 놓으시면 세상은 한순간에 무너지게 됩니다. 이번에 튀르키예와 시리아에서 일어난 강진이 그것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모든 소망을 주님께 두는 것이 가장 안전한 길인 것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이 재앙은 악인들을 향한 심판의 성격을 띱니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진노이기 때문입니다. 땅의 임금들, 왕족들, 장군들, 부자들, 강한 자들, 노예들, 자유인들 모두에게 재난이 임합니다. 일곱 가지 사건과 일곱 부류의 사람들이 언급됩니다. 7은 완전함을 상징하므로 이 표현은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광범위하고 철저한지 나타냅니다. 권력이나 재력 혹은 사회적 신분을 막론하고 모든 불의한 자들에게 재앙이 임합니다. 이 재앙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지 그들은 굴과 산들의 바위틈에 숨어서 떨며 차라리 산과 바위에 깔려 죽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자들이 다섯째 나팔 재앙이 임하자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상황과 비슷합니다(9:5).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하며 계시록 6장은 두려움의 탄식으로 끝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앞에서 공포에 질린 죄인들의 탄식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순교자들이 하나님께 속히 이루어 달라고 구했던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반영합니다. 악인들이 심판당하는 날은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 가운데 인내하며 온갖 고난을,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감당했던 성도들이 궁극적으로 승리하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께서 약속하신 심판과 승리의 날이 반드시 임할 것을 믿고 끝까지 인내하여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자세
-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사시대와 별로 다를 바 없는 혼돈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삶을 영위하다보니 세상은 점점 악해져 갑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삶의 기준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성경이 주시는 경고의 말씀은 반드시 진노와 심판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6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보면 그것이 어디까지 상징이고 어디까지 구체적으로 일어나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이 7년 대환란과 같이 한정된 시기에 속하는 심판인지 아닌지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모든 인생이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 앞에 서야 한다는 점입니다.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난리와 기근, 전쟁, 사망의 이야기는 이미 주님의 무서운 심판이 진행되고 있음을 증거합니다. 주님의 진노는 시대가 종말로 치달을수록 더 강도가 심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세상의 기준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장차 큰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6장을 피상적으로 이해하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의 장면만이 마음에 떠오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을 무작정 벌주고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거나, 자기의 목적을 위해 인생을 함부로 위협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예레미야 29:11에서 잘 보여줍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6절에 보면, 극심한 물자 결핍 상황 가운데서도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진노 중에서 긍휼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8절을 보면, 하나님은 세상을 4분의 1만 파괴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긍휼 베푸시기를 기뻐하시고 우리가 회개하고 주님 앞에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담대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님의 은혜 안에 사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보여준 그분의 사랑을 알기에 그분이 고난을 허락하실지라도 궁극적으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쪽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습니다. 7인 재앙, 7나팔 재앙, 7대접 재앙이 있을지라도 어린양이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럴 때 다윗의 고백이 바로 우리의 고백이 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우리가 궁극적으로 이길 것이고 오늘도 확실히 이기게 하실 것임을 확신할 때, 우리는 고난의 시간을 인내로서 기다릴 수 있게 됩니다.
- 순교자의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어린양이 다섯째 인을 떼실 때 순교한 자들이 하나님께‘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셔서 자신들의 피의 대가를 속히 갚아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재난과 고통의 때에 하나님 자녀들의 순교가 있습니다. 이 일은 앞으로도 순교자의 수가 다 차기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권세 앞에서 힘없고 약한 자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순교는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함께 걷는 영광스러운 길입니다. 무엇보다 주님이 주시는 영원한 위로와 안식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순교는 보다 넓은 의미에서 말하면 하나님이 허락하신 매일의 일상에서 자신을 부인하는 순교적 삶을 살아가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생을 믿기에 이 땅에서의 고난을 피하지 않습니다. 그의 삶은 철저하게 종말론적이기에 주님의 명령을 따라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죽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 삶이 바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입니다.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그런 삶을 살 때 종말의 때까지 죄인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담대히 전하게 됩니다.

나가면서
어린양이 처음 네 인을 떼시는 것으로 인해 네 말이 등장합니다. 이 말들은 전쟁과 기근 및 사망을 가져왔습니다. 반면에 다섯째 인과 여섯째 인이 열리자 특정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다섯째 인에서는 기도하는 순교자들이, 여섯째 인에서는 고통을 당하는 악인들이 등장합니다. 하늘 제단 아래에 있는 순교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다 죽임을 당한 이들입니다. 요한도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을 증언하다 밧모섬에 갇혔고(1:9), 순교자들은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20:4). 하나님은 성도의 죽음을 귀하게 보십니다(시 116:15). 종말론적 사건들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하나님의 관심은 여전히 고난을 당하는 신자들에게 있습니다. 요한이 본 환상은 먼 미래의 것들만이 아니라 현재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계 도처에서 끊이지 않는 죽음과 재난과 가난과 고통의 현실을 목도하면서 때가 가까웠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심판이 이미 시작되었습니다(마 3:10). 이 심판을 준비하는 자가 지혜 있는 자입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세상의 주관자로 인정하고 경배해야 합니다. 세상의 마지막에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이 언제 일어날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의 미래가 어린양이신 주님의 손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자들이 7인 재앙의 파도가 엄습해 올 지라도 우리의 미래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의 희생도 마다하지 않으신 주님이 펼쳐 가실 것입니다. 무슨 일을 만나도, 어떤 사건이 우리 앞에 닥쳐와도 두려움이 없이 그분의 인도함을 받으며 믿음으로 나아가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