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승리의 어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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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05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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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계 5:1-14


400년간 노예로 있던 출애굽 1세대는 추격하던 애굽 군대가 홍해에 수장되는 것을 보면서 감격 속에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이 없었기에 광야 여정을 찬양 대신 불평으로 채웠습니다. 그런데 2세대는 아버지 세대의 불신앙을 본받지 않고 믿음으로 전진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도 찬양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민수기 21:17~18절은 일명 ‘우물의 노래’라고 합니다. 출애굽 2세대가 브엘을 지나면서 노래한 것입니다. “우물물아 솟아나라 너희는 그것을 노래하라 이 우물은 지휘관들이 팠고 백성의 귀인들이 규와 지팡이로 판 것이로다”광야에서 하나님이 주신 물을 먹는 이스라엘의 기쁨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을 브엘로 인도하신 것은 단지 물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의 찬양을 받기 원함이었습니다. 출애굽 1세대는 찬양을 잃었지만 2세대는 찬양을 회복했습니다. 2세대는 마침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얻어맞고 빌립보 감옥에 던져진 바울과 실라가 한밤중에 기도하고 찬송했더니 옥문이 열리고 두려워 떨던 간수가 회심하게 되었습니다(빌 16:25). 믿는 자에게는 환경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강권하시는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기도와 찬송을 드리면 열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찬양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할 때 드리게 됩니다. 그러려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아야 하고, 그분이 우리에게 얼마나 놀라운 일을 행하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그분이 주실 승리를 확신하며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계시록 4장에서 요한은 하늘 보좌와 그 주변에 있는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보좌를 두르는 무지개, 일곱 영으로 표현되는 성령님, 수정 같은 유리 바다, 네 생물, 24장로들. 누가복음 20:43절에 의하면, “내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라고 하였는데, 하나님 우편에 계신 주님에 대해 4장에서는 언급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5장을 보니 주님이 등장합니다. 지상에 계실 때 예수님과 3년을 함께 보냈던 요한이 하늘 보좌에서 그분을 다시 뵙게 됩니다. 계시록은 로마제국의 통치를 받으며 사는 신자들에게 진정한 하나님의 통치가 하늘에서 뿐 아니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려 줍니다. 4장이 보좌 위에 좌정하신 성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었다면, 5장은 성자 예수님께 초점을 맞춥니다. 그 이유는 성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구원과 심판의 계획을 전개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은 주님이 그들을 외면하거나 그들의 신음 소리를 듣지 않으시기 때문이 아니라, 승리로 가는데 꼭 거쳐야 할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이미 십자가 고난을 거쳐 부활 승리를 경험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예배를 드리는 분들도 고난이 삶의 일부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날마다 영적 전쟁을 잘 수행함으로 나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면서 훗날 하늘 보좌 앞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특권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봉인된 두루마리(1-4절)
요한의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들려져 있고 안팎으로 쓰이고 인봉된 두루마리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는 하나님이시고 오른손은 주권과 능력을 상징합니다. 두루마리에 ‘안팎으로 썼다’는 것은 더하거나 뺄 것이 없게끔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구약 성경은 두루마리의 형태만이 아니라 내용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제공합니다. 에스겔 2:9-10을 보면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그 위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로 되어 있습니다. 위의 구절에 근거해 본다면 이 두루마리는 재앙과 심판의 메시지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5장이 끝나고 각각의 인들이 열려지면서 전개되는 일곱 인 재앙-일곱 나팔 재앙-일곱 대접 재앙의 내용이 그것을 입증해 줍니다. ‘일곱 인으로 봉하였다’는 것은 두루마리를 다 만 후에 일곱 개 인을 한 번에 다 붙였다는 것이 아니라 일곱 개의 내용으로 구분된 것이 개별적으로 봉인되었다는 것입니다. 두루마리를 조금 만 후에 첫째 인을 붙이고 조금 더 만 후에 둘째 인을 붙이는 방식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루마리 겉에는 일곱 번째 인만 붙어 있게 됩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놓여 있는 두루마리는 진노와 심판에 관한 내용뿐만 아니라, 최종적인 구속의 완성과 그로 인한 하나님 백성의 승리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7개의 인으로 철저하게 봉해져 있지만,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책의 인들이 떼어지면서, 악인은 심판을 받고 의인은 승리하게 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때 힘 있는 천사가 나타나 큰 음성으로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고 외칩니다. 힘 있는 천사는 10:1과 18:21에도 나오는데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다 들리게 할 수 있는 큰 음성이 필요해서 등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두루마리의 인을 누가 뗄 수 있는지 묻는 질문은 ‘누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할 것인가’혹은 ‘누가 종말을 임하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 그 인을 뗀다는 것은 두루마리의 내용을 계시할 뿐 아니라 그것을 성취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능히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더라”는 말은 그런 사람이 있는지 요한이 부지런히 살펴보았다는 뜻입니다. 아무도 두루마리 인을 떼기에 합당하지 않다면,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 계획이 시행될 수 없다면, 하나님 백성들은 사탄과 그 하수인들로부터 여전히 박해와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순간 요한의 머릿속에 고통가운데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는 성도들의 얼굴이 스쳐갔을 것입니다. 요한은 두루마리를 펴고 인을 뗄 자격이 있는 자를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기에 낙담하였고, 주체할 수 없는 슬픔으로 통곡하였습니다. 그가 흘리는 눈물은 또한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슬픔이 어떻게 위로를 받았는지 기술함으로써 이글을 읽는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 진한 눈물을 흘리며 나아와야 할 것을 권면합니다.

두루마리를 취하시는 어린 양(5-7절)
요한이 통곡할 때, 장로들 중의 한 사람이 요한에게 울지 말라고 합니다. ‘울지 말라’는 말은 직역하면 ‘울음을 그치라’입니다. 이것은 울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니라 울음을 그칠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그 두루마리를 열 수 있는 합당한 자가 발견되었다는 겁니다.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예수 그리스도가 ‘유다 지파의 사자’와 ‘다윗의 뿌리’로 소개됩니다. ‘유다 지파의 사자’는 창세기 49:9을 배경으로 합니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창 49:9) ‘유다 지파의 사자’는 야곱이 유다 지파를 향한 축복의 예언을 반영한 것으로 야곱이 유다를 가리켜 ‘사자 새끼’라 하였습니다. 주님은 유다 지파에서 나오신 왕으로서 진정한 승리자시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뿌리’라는 표현은 이사야 11:10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뿌리’는 조상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사야 11:1을 보면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라고 합니다. 줄기는 후손을 뜻합니다. 메시아가 어떻게 다윗의 조상도 되고 후손도 됩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감추어진 비밀이었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다윗의 뿌리가 되시고, 육신적인 혈통적으로 따진다면 다윗의 후손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그리스도의 오심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승리를 통해 승리하셨기 때문에 세상을 심판하시고 주의 신실한 백성을 구속과 완성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그분이 이기셨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인 떼기에 합당하신 분에 대한 외침은 요한이나 초대 교회 성도들뿐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포효하는 사자의 모습이나, 위엄에 찬 전사로서 등극하신 주님의 모습을 기대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이기셨습니까? 이에 대한 해답을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라는 구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조금 전에 ‘사자’로 소개되었던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으로 등장합니다. ‘사자’로 대변되는 예수님의 승리는 어린양의 죽음으로 가능하게 되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함입니다. “같더라”는 표현은 어린양이 어떤 죽임 당함의 흔적이나 인상을 지니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언뜻 패배당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대로 죽으심으로 그를 믿는 사람들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심으로 승리자가 되셨고, 이제는 심판을 시행하시는 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계속되는 어린양에 대한 언급 중에 주목해야 할 두 가지 모습은 그가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계시록에서 ‘일곱’은 완전을 의미하고 뿔은 권세와 능력을 상징합니다. 완전수 일곱과 능력의 상징인 뿔을 결합시켜 어린양이 완전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린양은 또한 일곱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눈은 통찰력을 의미합니다. 일곱과 연결하여 설명하면, 어린양이 모든 곳을 두루 살필 수 있는 완전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4장에서는 하늘의 성전을 묘사하는 문맥이므로 성전을 밝게 비추는 일곱 등불을 배경으로 성령을 일곱 영이라고 했는데, 5장에서는 예수님의 사역을 온 세상에 널리 알리는 문맥이므로 성령을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일곱 눈’으로 표현합니다. 성령의 사역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임했음을 온 땅에 알리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두루마리의 인을 떼실 수 있는 분은 유다 지파의 사자요 다윗의 뿌리이시면서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신 예수님입니다. 이제 그 어린양이 나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십니다. 두루마리의 인을 뗀다는 것은 중요한 구속사적 의미를 갖습니다. 이 두루마리가 예수님에 의해 열린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종말적 사건의 중심에 서 계심을 의미합니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님이 세상의 구속과 심판을 집행할 전권을 받습니다.

어린양을 향한 경배(8-14절)
4장 후반부와 같이 5장 후반부에 찬양과 경배가 등장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4장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경배라면, 5장은 구속자이신 어린양 예수님에 대한 찬양이라는 점입니다. 어린양이 두루마리를 받으시자 주변에 있는 네 생물과 24장로들이 어린양 앞에 엎드립니다. 창조주 하나님에게 드렸던 경배와 동일한 경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들의 손에 하프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이 있습니다. 하프는 찬송을 반주하기 위한 것이고,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은 성도들의 기도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에서 성도의 기도가 등장합니까? 출애굽기 2:23-25에 의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언약을 기억하셨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기도가 하나님이 구원을 이루시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출애굽 사건의 경우처럼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의 기도가 중요함을 알려줍니다. 이때 하늘에서 새 노래가 울려 퍼집니다. 새 노래라는 것은 곡조가 새롭거나 가사가 새롭기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감격으로 부르는 노래를 가리킵니다. 구원 받은 자가 아니면 부를 수 없는 노래입니다. 성전 예배 지도자들이 영감을 받아 지은 시편을 구약에서 ‘새 노래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노래들은 이스라엘이 유월절 양의 피로 애굽에서 구속된 것은 반영한 노래였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불리는 새 노래는 인종을 초월해 천사들과 함께 예수님에 대해 부르는 신령한 것입니다. 새 언약을 성취하신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찬미하는 새 노래는 구약의 새 노래 보다 더 놀라운 것입니다. 새 노래의 주제는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신 그리스도’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그리스도’입니다. 어린양은 일찍이 죽임을 당하셔서 온 세상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그들을 나라와 제사장들로 삼으셨고, 땅에서 왕 노릇 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온 세상의 구주이십니다. 앞서 요한은 피 흘리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했습니다(1:5-6). 우리 또한 고난 속에서도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며 새 노래로 어린양께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요한의 눈앞에 엄청난 장면이 펼쳐집니다. 계시록 4장의 묘사에 따르면, 하나님의 보좌, 하나님의 일곱 영, 네 생물, 24 장로 등이 동심원을 이루고 있는데, 5장에는 수많은 천사가 보좌와 네 생물과 24 장로들을 둘러 서 있습니다. 네 생물과 24 장로들의 찬양은 자연스럽게 천사들의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천사의 수가 만만이요 천천입니다. 이것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무리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한 개의 정관사로 연결된 7중적인 표현, 즉 능력, 부, 지혜, 힘, 존귀, 영광,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고 찬양합니다. 이어서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전능하신 하나님과 어린 양을 경배합니다. 12절과 달리 여기서는 정관사가 각각의 명사(찬송, 존귀, 영광, 권능) 앞에 있어 개별적으로 강조합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어린양을 찬양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어린양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셔서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자기와 화목하게 된 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골 1:20). 피조물의 찬양에 네 생물은 아멘으로 화답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합니다.

우리의 자세
장차 우리들은 요한이 보았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눈을 들어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준비를 해야 합니까?
- 주님 앞에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애통하고 울며 그분 앞에 서는 사람에게 길을 열어주십니다. 느헤미야 1장을 보면 포로가 된 것을 겨우 면하고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형편이 아주 열악하고, 예루살렘 성도 훼파되고 성문들은 불에 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느헤미야는 통곡했습니다.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은 현실로 인한 처절한 부르짖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절대로 민족의 현실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이 느헤미야의 눈물을 보셨습니다.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은 한 사람의 처절한 눈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극심한 고통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린 아픔의 현실을 딛고 일어서야 하는 초대 교회 성도들의 무기는 바로 눈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눈물이 필요합니다. 단지 손해를 보거나, 무시를 당하거나, 억울하고 원통해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자기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섭섭해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며 흘리는 눈물이 필요합니다. 마음은 원인데 여러 가지 사정을 인하여 주님께 더 충성하지 못함을 인하여 흘리는 회개의 눈물이 필요합니다. 아직도 주님께 돌아오지 않고 방황하는 이웃을 보면서 흘리는 긍휼의 눈물이 필요합니다. 언제까지 눈물을 흘립니까? 하나님의 응답이 임할 때까지입니다.
- 기도해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연기에 비유했습니다.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시 141:2) 어린 양께 경배할 때 기도를 올리는 이유는 성도들의 기도가 땅에 떨어지지 않고 하나님을 경배하는데 쓰이고 있음을 확인시킵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는 일에 성도의 기도가 아주 큰 역할을 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명령은 종말의 시기에도 적용됩니다(살전 5:17).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울수록 우리는 깨어(롬 13:11) 기도에 더 힘써야 합니다. 성도의 믿음과 소망이 담긴 기도는 천사의 손에 의해 금제단에 드려지며 하나님께 전달됩니다(8:4). 그리고 그 향로가 쏟아지면서 심판이 시작됩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와 뜻이 이루어집니다. 기도의 불이 꺼지지 않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새벽기도, 주일중보기도, 화요기도, 날마다 930 온라인기도가 중요합니다.
- 주님께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찬양은 단순히 곡조를 따라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그분이 행하신 일을 바라볼 때 우리 속에서 절로 터져 나오는 기쁨의 함성이 찬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찬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주시고 우리를 찬양의 자리로 초대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분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심을 통해,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지라도 주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승리를 확신할 때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진들은 광야에서, 감옥에서, 박해를 받는 상황에서도 찬양을 했습니다. 우리는 장차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과 수많은 천사들과 더불어 어린 양께 경배할 자들입니다. 찬양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드릴 수 있는 거룩한 감정의 표현이기에 악기를 사용하든 사용하지 않든 곡조가 있든 곡조가 없든 상관없습니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지금 광야를 지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길이 아무리 힘들고 험할지라도 인도하시는 주님이 여전히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을 때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막힌 것이 열리는 승리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나가면서
하나님의 오른손에 있는 두루마리를 펴고 일곱 인을 떼실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은 역사의 진행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주권 아래에 있음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은 사자와 어린양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사자로 먼저 소개되지만 이후 어린양으로 등장하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임 당한 어린양이 되심으로써 승리자가 되셨음을 암시합니다. 어린양은 사랑과 용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사자는 정의와 심판의 예수 그리스도를 연상시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자기를 버리신 예수님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진정 따라야 할 본입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내어줌과 희생으로 세상을 섬겨야 합니다. 인내와 순결함과 심지어는 죽기까지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에 합당한 믿음의 사람들,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사람들, 풍성한 열매를 인하여 주님을 감격하시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셔서 언제나 하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을 찬양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