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하늘 보좌의 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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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29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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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계 4:1-11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부딪칠 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속담을 인용하면서 위로합니다. 그 속담은 성경적으로도 맞는 말입니다. 고난이 삶의 일부인지라 믿음이 있어도 고난을 당하게 마련입니다. 그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지금 육신의 질병이나 경제적인 이유, 혹은 다른 이유로 힘든 때를 보내고 계십니까? 오직 감당할 시험만을 허락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마련하시는 분이 우리가 믿고 섬기는 주님이십니다. 고난이 없을 수 없으나 우리는 여전히 그분께 시선을 고정하고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2000년 전 계시록이 쓰일 당시에도 성도들은 하루하루 생존을 염려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계시록은 교회가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찬양해야 하는 근거를 제시합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분들도 살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지만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붙들며 위로를 받고 소망을 가질 뿐 아니라 주님 앞에 가는 그날까지 하나님을 찬양하며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보좌로의 초대(1절)
요한계시록 2~3장은 각 교회의 실상을 잘 아시는 주님께서 그 교회에 맞는 메시지, 즉 칭찬과 책망과 약속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4장부터는 장면이 완전히 바뀝니다. 2~3장이 교회가 직면한 지상의 현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4장은 하나님이 앉아계신 하늘 보좌를 중심으로 천상의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계시록의 본론 부분인 6-16장뿐만 아니라 결론 부분인 17-22장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4장과 5장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입니다. 사도 요한이 경험한 첫 번째 환상이 지상에서 그리스도를 보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이었다면, 두 번째 환상에서는 그가 하늘의 열린 문 가운데로 들림을 받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이 구문을 직역하면 ‘내가 하늘에 있는 열린 문을 보았다’가 됩니다. ‘하늘’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에 계신 곳이며, 성부께서 계시고, 천사도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요한을 처음 만나셨을 때 ‘와서 보라’(요 1:3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하늘에서 요한을 다시 부르시는데, ‘이리로 올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로 올라오라고 말하는 나팔 소리 같은 음성은 앞서 요한에게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편지를 써 보내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주님의 음성입니다(1:10). 성경에서 ‘문’은 종종 구원과 관련해서 사용됩니다. ‘하늘에 있는 열린 문’은 ‘하늘이 열리다’라는 표현과 유사한 의미를 전달합니다. 성경에서 ‘하늘이 열리다’는 표현은 주로 하나님의 계시가 임하는 장면에 사용됩니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하늘 문을 통해 천상의 광경을 목격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앞으로 있을 일을 요한에게 알려주기 위해 요한을 하늘 보좌로 초청하셨습니다. “마땅히 일어날 일들”은 “반드시 속히 될 일들”(1:1)과 동일한 표현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될 구원의 역사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2-3절)
요한이 ‘성령에 감동되었다’는 말은 ‘성령 안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표현은 1절의 ‘올라오라’는 표현과 함께 ‘성령에 의해 이끌림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계시록에서 요한이 전하는 말씀이 하늘로부터 계시된 것임을 알려줍니다. 환상 속에서 요한이 처음으로 본 것은 하늘 보좌였습니다. 3:21에서는 이기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해주실 것이라고 약속했는데, 여기서 그 보좌가 실제로 나타납니다. 보좌는 그곳에 앉은 주권자의 권능과 지배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그 보좌에서 우리의 삶과 교회와 온 우주 만물을 다스리십니다. ‘보좌’라는 단어가 4장에만 14번 등장합니다. 계시록에는 두 개의 보좌가 언급됩니다. 하나는 하늘에 펼쳐진 하나님의 보좌이고 다른 하나는 짐승의 보좌입니다(13:2; 16:10). 계시록은 하나님과 사탄, 이 두 초자연적인 존재 사이에 벌어지는 파워 게임을 다루고 있습니다. 구약에 보면 ‘누가 참 신인가’하는 주제로 많은 이야기들이 전개됩니다. 이를테면 출애굽 사건은 신들의 싸움입니다. 이스라엘이 섬기는 신 여호와와 애굽 사람들이 섬기는 신들 중에 누가 더 강하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열 가지 재앙을 통하여 애굽 사람들이 신으로 여기는 존재들인 나일강, 개구리, 파리, 태양 등을 하나하나 제압하심으로 여호와만이 참 신인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결과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내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계시록에서도 두 보좌의 이야기를 통하여 과연 누가 궁극적인 통치자인지, 누가 역사의 진정한 주관자인지 알려줍니다. 당시 세상의 중심은 로마 황제였습니다. 계시록을 기록할 당시의 황제였던 도미티안은 스스로를 신으로 선포하며 황제 숭배에 집착했습니다. 백성에게 자기를 ‘우리 주 우리 하나님’으로 부르게 했습니다. 황제 숭배를 강요받은 성도들에게 하늘에 보좌가 있고 그 주변에 경배자들이 서 있는 광경을 보여 준 것이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교회가 환난을 피해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환난 속에서도 주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는 사람들이라고 증언합니다.

요한은 하늘 보좌를 보았지만 보좌 자체에 대하여 묘사하지 않습니다. 보좌의 크기는 어떻고, 모양은 어떻고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언급하지 않습니다. 오직 보좌 위에 앉으신 이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는 성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모습은 벽옥과 홍보석 같고, 보좌를 둘러싼 무지개의 모양은 녹보석 같다고 합니다. “~ 같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우월성, 즉 인간이 범접할 수 없고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상징합니다. ‘벽옥과 홍보석’은 대제사장의 흉패에 있는 보석 중 마지막과 첫 번째 것이며, 새 예루살렘 성의 기초석 중 첫 번째와 여섯 번째 것입니다(21:19-20). 특히 홍보석의 주산지는 사데인데, ‘사데’라는 이름이 ‘붉다’라는 뜻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형상을 푸른색과 붉은 색으로 대표되는 찬란한 빛으로 표현합니다. 벽옥은 붉은 색, 노란 색, 갈색을 띤 jasper, 홍보석은 붉은 빛을 띤 루비, 녹보석은 녹색을 띤 에메랄드를 가리킵니다. 무지개는 원래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노아와의 언약의 상징인데, 보좌 앞에 있는 무지개는 로마 황제의 통치 아래 있던 성도들을 끝까지 지켜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결단을 암시합니다.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다’에서 ‘있다’는 미완료시제로 하나님이 세상에서 멀리 떨어져 계신 것 같지만, 창조 이후로 끊임없이 통치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보좌 주위의 광경(4-8a절)
24장로들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학설은 크게 2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경배하려는 목적으로 창조된 하늘의 천사로 보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신구약을 총칭하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이해하는 입장입니다. 최근에 들어서는 이 두 입장을 절충하여 구약과 신약의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존재라는 주장이 힘을 얻는 추세입니다. 24장로가 흰옷을 입고 면류관을 쓴 장면은,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존재인지를 알려줍니다. 당시 세상의 관점에서 교회는 별 볼일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천상적 존재로서의 교회는 승리와 영광을 상징하는 흰옷을 입고, 면류관을 쓴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는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현재의 모습은 초라하지만 미래에는 현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승리와 영광의 자리에 서게 될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24장로들처럼 거룩함의 상징인 흰옷을 입고 금 면류관을 쓰고 하늘 보좌 곁에서 영원토록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이리로 올라오라’는 말씀이 있기까지 우리 모두 주님을 충성스럽게 섬겨야 합니다.

요한이 하나님이 좌정하신 보좌 주변을 살펴보는데 번개와 더불어 음성과 뇌성이 크게 울려 퍼집니다. 비록 요한은 이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기술하지 않지만 이것은 분명 하늘 전체를 울리는 소리였을 것입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셨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이 출애굽기 20장 18절에 나옵니다. 뭇 백성이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보고 떨며 멀리 섰다고 합니다. 하늘 보좌 앞에는 일곱 등불이 켜 있는데, ‘등불’은 작은 등잔이 아니라 활활 타오르는 큰 횃불을 가리킵니다. 요한은 이를 일곱 영과 동일시하는데, 7은 완전을 상징하는 숫자이므로 충만한 상태로 존재하는 성령을 가리킵니다. 요한은 1장에서 성령에 감동되어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고(1:10), 4장에서는 성령에 감동되어 환상을 봅니다. 지상에서 성령님의 또 다른 이름은 ‘보혜사’(우리 곁에 있도록 부름 받은 존재)인데, 하늘에서는 ‘보좌 앞의 일곱 영’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모든 뜻을 다 알고 계시며 또한 그것을 우리를 통하여 이루십니다. 하늘 보좌 앞에는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 ‘같은 것’인데 하나님의 초월적 속성을 나타냅니다. 유리 바다는 솔로몬 성전에 있는 큰 그릇인 바다를 모티프로 합니다. 하늘 성전의 거룩함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고, 보좌 앞의 고요와 평안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유리 바다는 교인들로 하여금 풍랑이 이는 세상 속에서도 절망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보좌 가운데와 그 주위에는 앞뒤로 눈이 가득한 네 생물이 있습니다. ‘생물’로 번역된 단어는 ‘살아있는 존재/물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계시록에 자주 나타나는 ‘짐승’과는 다른 단어로 ‘살아 있는 상태’를 강조합니다. ‘눈들이 가득하다’라는 표현은 생물들의 무한한 지적 능력과 잠들지 않는 본질을 전달합니다. 이 표현 역시 ‘살아 있는 존재’라는 묘사와 일맥상통합니다. 그들이 끊임없이 주시하며 통찰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쉬지 않고 쳐다보며 거룩한 보좌를 지킵니다. 네 생물은 에스겔 1장과 10장에 묘사된 네 생물, 즉 그룹들 및 이사야 6장에 묘사된 스랍들을 연상시킵니다. 네 생물의 모양은 각각 사자와 송아지와 사람과 독수리같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들은 각 분야의 최고로 간주되는 것들입니다. 사자는 야생동물의 왕이요, 독수리는 새들의 왕입니다. 또한 소는 가축 중에서 최고요, 사람은 만물의 영장으로 피조물 중에 최고입니다. 다시 말하면 네 생물은 모든 피조물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네 생물이 날개를 여섯 개씩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데 있어서의 ‘신속함’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많은 눈들’은 에스겔 10:12과 관련이 있는데, 깨어 있으면서 정확하게 인지하는 통찰력을 상징합니다.

보좌에 울려 퍼지는 찬양(8b-11절)
계시록 4장과 5장의 끝부분은 찬양과 예배로 마무리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행위는 하나님을 높이고 그분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왕이시라는 고백의 행위가 바로 예배입니다. 세상에 있는 거짓된 왕에게 경배할 것을 강요당하고 있던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계시록 곳곳에서 찬양과 경배의 장면이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황제 숭배의 압력이 아무리 거세다고 할지라도 하늘 보좌에 좌정하신 진정한 왕께만 경배를 드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no other name(다른 이름은 없습니다), no other God(다른 신은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네 생물이 드리는 찬양의 내용은 하나님의 거룩함, 하나님의 능력, 그리고 창조주로서의 영원성입니다. 먼저 그들은 밤낮 쉬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들의 눈은 온 세상을 향하고, 그들의 입은 모든 시간과 공간을 찬양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거룩하다’를 3번 반복한 것은 피조물이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 느끼는 비길 수 없는 최상급의 감정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은 두려움과 경외감을 일으키며 어떤 악의 접근도 용납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문맥상 하나님의‘전능하심’은 창조의 능력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십니다. ‘계셨고’는 미완료시제로 과거에 내내 존재했음을 나타내고, ‘계시고’는 현재 시제이므로 지금도 여전히 존재함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장차 오실 이’는 미래시제가 아니라 현재 분사입니다. 지금 오고 계심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성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네 생물들이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인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드릴 때 이십사 장로들은 24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경배합니다. 그들이 엎드린 것은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최고의 예우를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이한 점은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내려놓았다는 것입니다. 면류관을 벗는 행위는 권세를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을 상징하며 하나님께 전적인 헌신과 복종과 충성을 맹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시요, 세상의 모든 존재는 그분이 만드신 피조물이기에 24장로들은 하나님이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심이 합당하다고 찬양합니다. 제 아무리 힘이 있고 영원한 권세를 가진 것 같아 보이는 로마황제조차도 경배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황제 숭배의 도전 앞에 서 있는 성도들에게 큰 위로와 저항을 위한 결연한 의지를 새롭게 다지게 만들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의 자세
주님이 일곱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받은 요한은 성령에 감동되어 하늘에 열린 문으로 들어갔습니다. 요한은 그곳에서 본 하늘 보좌에 대해 묘사했습니다. 요한이 바라본 영광스러운 천상의 모습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제공합니까?
-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1세기에 로마 황제의 권력은 절대적이었고, 교회는 그 앞에서 힘이 없었습니다. 로마 황제는 자신만을 왕으로 섬길 것을 강요했습니다. 만약 이를 거부한다면 죽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환상 중에 본 것은 로마 황제보다 더 높은 분이 영광중에 하늘 보좌에 좌정하고 계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계신 성령께서 끊임없이 교회에 생명력을 공급하십니다. 환난 가운데 지켜 주시며, 시험 중에 피할 길을 마련하시며, 박해 속에서도 담대하게 왕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하십니다. 요한이 목도한 하늘 보좌의 장면은 누가 진정 역사의 주관자이신 가를 보여줍니다. 성도는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진정한 예배는 우리 자신을 철저하게 부인하고 하나님의 왕 되심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참된 찬송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선하심과 영광스러우심을 깨닫는 데서 나옵니다. 이십사 장로들과 네 생물들은 나름대로 최고임을 자부할 수 있는 존재들이었지만 하나님 앞에 철저히 자신들을 낮추며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렸습니다. 제 아무리 힘이 있고 영원한 권세를 가진 것 같아 보이는 로마 황제조차도 호흡이 코에 있는 인생에 불과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하늘 보좌에서 들려온 찬양의 메시지는 ‘어떠한 위협에도 굴하지 말고 오직 경배 받기에 합당하신 우리 주 하나님께만 고개를 숙이라’는 것입니다. 경배의 대상이 누구인가에 따라 삶의 열매가 달라지고 주님으로부터 받는 상급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경배해야 할 존재로 부름 받았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말했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아야 합니다
앞으로 반드시 일어날 일을 보여 주겠다고 하시고는 요한에게 제일 먼저 보여주신 것은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극심한 고난이 오래 지속되다 보면 그 문제에 몰입해서 하나님을 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건강, 재정, 관계, 진로 등에 문제 있어 그 문제가 누르고 있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우리의 시선과 초점이 온통 문제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이럴 때 먼저 해야 할 일이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낙담과 절망은 우리의 시선을 빼앗아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하늘의 열린 문을 통해 바라보게 된 하늘 보좌의 광경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시는 희망의 불빛과 같았습니다. 물론 그것은 교회에 더 이상 고난이나 박해가 없을 것이라는 약속은 아닙니다. 얼마 전 달 궤도에 진입한 한국의 달 탐사선 다누리호가 달 상공에서 지구를 찍은 사진을 보내왔습니다. 이 땅에서 보는 것과 달리 우주에서 보는 푸른 빛깔의 지구는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마찬가지로 천상의 환상은 하늘 보좌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현실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 소망을 가지고 나아갈 때에 성도들은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갈지라도 담대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위기에 빠진 요한과 성도들을 위해 지상의 세계 너머 하늘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시켜 주기 원하셨습니다. 주님은 교회 공동체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펼쳐지는 현상에만 몰두해서는 안 되고, 세상 너머의 세계를 보라고 하십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비로소 우리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고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할 수 있게 됩니다.
- 하나님의 거룩함을 본받아야 합니다
네 생물들이 쉬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중에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거룩을 세 번 반복한 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거룩하심을 나타냅니다. 성경에 ‘거룩’이라는 단어가 447번 나옵니다. 그렇게 많이 나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백성에게도 거룩을 요구하십니다. 구약 시대에만 거룩을 요구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성도들에게도 거룩을 요구하십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롬 12:1)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 앞에 거룩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모든 면에서 세상과 구별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삶의 기준이 됨을 의미합니다. 우리 스스로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스스로 거룩해질 수 없기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성도들이 세상의 악에 물들지 않고 언제나 영적, 도덕적으로 깨끗하기 원하십니다.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은 그들을 거룩하게 만드는 과정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십니다. 성령 훼방죄가 무엇입니까?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께 죄 용서를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 용서를 받지 못하니 그에게 죄는 그대로 있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기 원한다면 우리가 먼저 거룩해져야 합니다.

나가면서
우리는 하늘 보좌에서 울려 퍼지는 위로의 음성을 가지고 현재 당하는 고난과 핍박, 앞으로 다가올 재앙과 심판의 시대를 바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계시록에 기록된 세상의 종말과 관련된 사건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 있을지라도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분명히 살아 계시다는 것과, 인간의 역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하늘 보좌에 대한 계시는 이 땅에 있는 로마 황제의 보좌가 허상임을 보여줍니다. 계시록은 이 땅의 권세가 가할 수 있는 박해가 제한적임을 일깨워 줍니다. 땅의 권세는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의 묵인 하에 일시적으로 행사될 뿐입니다.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로부터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만물의 창조주이자 주관자이십니다. 천상의 모습을 묘사한 목적은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일깨워 주면서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십사 장로들과 네 생물의 행위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받은 성도들의 존재 의미를 깨닫게 합니다. 그들은 입술로만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에 온전히 굴복하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 또한 입술만이 아니라 몸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영적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롬 12:1). 종말론적 신앙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현재보다 미래를 보고 살아가는 신앙입니다. 이 신앙을 가지고 나아갈 때 성도는 고난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 고난은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말세를 사는 우리들은 하나님을 바로 알고 그분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며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오늘도 하늘 보좌를 바라보면서 살든지 죽든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사는 거룩한 주님의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