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그리스도의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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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3-01-15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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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계 1:9-20


살다보면 힘들고 지칠 때가 있습니다. 외롭습니다. 질병으로 인해 몸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의욕이 떨어집니다. 기쁨과 감사가 사라집니다. 그럴 때 누군가 격려하고 위로를 하면 큰 힘을 얻게 됩니다. 1세기 로마제국에서 신앙생활은 우리의 신앙생활과 달리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함께 신앙생활 하던 형제나 자매들이 어느 날 끌려가서 감옥에 갇히거나 죽음을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왜 예수님을 믿는데 이렇게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의심이 들 수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의 사자를 통해 “두려워하지 말라”는 주님의 메시지를 듣고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한 주님의 계획을 들었을 때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겠습니까? 그래서 계시록이 쓰였습니다. 지난주 계시록 1:1-8을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는데, 오늘은 1:9-20을 ‘그리스도의 위로’라는 제목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주신 첫 번째 환상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주후 95년경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가 통치하던 시기에 밧모라는 섬에 잡혀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죄수로 유배된 그 섬에서 요한이 주님을 만났습니다. 밧모 섬은 그리스와 터키 사이에 있는 에게 해에 위치한 스포라데스 군도의 한 섬으로 길이 17km, 너비 10km밖에 되지 않는 척박하고 바위투성이인 섬입니다. 로마 당국이 죄수들을 유배 보내던 곳으로 악명 높은 강제 노동이 이루어졌다고 전해집니다. 박해로 인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지키다가 죽어가던 상황에서 교회에게 말씀하시고, 교회와 함께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환상은 박해로 인해 고난 받던 신자에게 큰 위로를 주었습니다. 세상의 어떤 위로보다도 예수님이 주시는 위로는 완전하며 영원합니다. 주님은 요한에게 여러 환상과 일곱 교회에 일어나고 있는 일,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기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계시록의 내용은 요한이 밧모 섬에서 보았던 환상, 가까운 미래에 일어날 일, 그리고 먼 미래에 이루어질 예언으로 구분됩니다.

계시를 받은 요한(9-11절)
사도 요한 만큼 부활, 승천하셔서 현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인상 깊게 전해준 사람은 없습니다. 요한은 자신을 ‘너희 형제’와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로 소개합니다. 요한이 자신을 형제라고 밝히는 이유는 요한도 일곱 교회 교인들과 같이 예수님을 믿고 전하다가 환난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환난”에서 ‘예수의 ...’는 ‘예수 안에 있는 ..’라는 의미입니다. 곧 환난과 나라와 참음은 예수님 안에 있는 것들입니다. 예수님 안에 평안과 기쁨과 위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도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복음을 위해 핍박과 고난당함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참으셨듯이 요한은 영생의 소망 가운데 인내했습니다. 요한에게, 그리고 계시록을 읽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한다는 것은 환난과 인내를 수반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결과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증언하다가 붙잡혀 밧모 섬에 유배되어 있었습니다. 때로는 자유를 박탈당하기도 하고 소유를 빼앗기기도 하고 심지어 생명을 빼앗기는 핍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 사역자들 뿐 아니라 모든 성도의 바른 자세입니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이 구문을 직역하면 ‘내가 주의 날에 성령 안에 있게 되었다’가 됩니다. ‘주의 날’이라는 표현이 신약성경에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주의 날’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 즉 안식일 다음 날인 주일을 가리킵니다. 요한은 비참하고 혹독한 환경에 놓여 있었는데 그곳에서 성령에 감동되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요한이 본 주님은 영광스럽고 거룩한 모습이었습니다. 황량한 밧모 섬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한 것입니다. 밧모 섬에서 날마다 박해와 순교로 고통당하는 성도와 교회를 위해 기도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던 때, 요한의 뒤에서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나팔 소리’는 구약시대에 백성을 소집하거나 군사적으로 경고할 때, 전쟁할 때, 절기 때 사용되었습니다. ‘들었다’는 것은, 심령을 일깨우는 그리스도의 계시가 임했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현상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을 때 나타난 현상과 유사합니다. 출애굽기 19장을 보면 나팔소리가 하나님의 음성과 함께 시내 산에 울려 퍼졌습니다. 요한이 그가 본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적어서 보내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이는 출애굽기에서 ‘이것을 책에 기록하라’(17:14)고 하신 내용과 유사합니다. 책에 기록하라는 명령은 구약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많이 들었던 명령입니다(사 30:8, 렘 35:2,4). ‘쓰다’와 ‘보내다’가 과거 명령형입니다. 당장 시행하라는 것입니다. 계시록은 모든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책이지만 일차적으로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낸 글입니다. 요한은 자기가 듣고 본 것을 기록해 일곱 교회에 보냈습니다.

그리스도의 환상(13-16절)
요한이 뒤에서 들려온 음성을 알아보려고 돌이켰습니다. 그때 그가 본 것은 금촛대 사이에 계시는 ‘인자 같은 이’였습니다. 그렇다면 10절에서 요한이 들었던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은 바로 ‘인자 같은 이’의 음성입니다. ‘인자 같은 이’는 다니엘이 환상으로 받은 계시 속에 나타난 메시아에 대한 묘사입니다(단 7:13-14). 요한은 ‘인자’라고 쓰지 않고 ‘인자 같은 이’라고 썼습니다. 자기에게 보인 만큼, 자기가 이해하는 정도만을 기록한 것입니다. 일곱 금촛대 가운데 계시며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띤 대제사장의 의복 같은 것을 입으신 예수님의 모습은 성육신하신 예수님과 사뭇 다른, 초월적인 하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13절의 ‘촛대’, 곧 일곱 촛대는 스가랴 4장을 토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스가랴 4장에는 촛대 위에 일곱 개의 등잔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곱 개의 등잔은 하나님의 영을 가리키고 있으므로 촛대 위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셈이 됩니다. 계시록에 스가랴서 내용을 적용시키면, 요한이 바라본 그 촛대 위에 등잔이 있으며, 그 등잔은 4절의 일곱 영이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20절의 등잔을 교회로 해석하는 것은 스가랴 4:2에서 일곱 촛대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해석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일곱 촛대 위에 일곱 등불이 놓여 있는 모습은 성령이 불꽃처럼 교회를 비추며 능력을 공급하고 계시는 것을 암시합니다. 촛대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 계신 모습은 교회 공동체의 머리로써 임재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다’는 것은 거룩함과 순결함을 상징합니다. ‘불꽃같은 눈’은 교회와 세상을 감찰하시는 통찰력을 의미합니다. ‘풀무 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은 발’은 물리치신 대적을 밟고 계신 예수님의 능력을 뜻합니다. ‘많은 물소리와 같은 음성’은 권세와 위엄으로 말씀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보여 줍니다. 그분의 음성은 죄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시는 음성이기도 하지만, 마지막 날에는 심판을 선고하시게 될 무서운 음성이기도 합니다.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주권적인 힘으로 교회 사역자들을 보호하시고 붙드심을 보여 줍니다.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는 것’은 예수님이 능력의 말씀을 선포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계시록에서 ‘입’은 심판과 관련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대적을 심판하시고 정복하십니다.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다’는 표현은 영광과 권능의 빛으로 충만하신 것을 뜻합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신 분으로 나타납니다.

계시를 기록하라는 주님(17-20절)
최후의 만찬 때에 예수님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던 요한은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예전과 같은 친숙한 반응을 보일 수 없었습니다. 요한은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되었습니다.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영광스러운 모습을 목도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사 6:5), 그리스도의 핍박자였던 사울(행 9:4)도 그분 앞에 죽은 자처럼 엎드렸습니다. 우리 역시 감히 그리스도의 영광 앞에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때 주님은 오른손을 요한에게 얹으시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의 손을 대시고 평안의 목소리로 요한을 위로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환난과 박해 속에서 믿음을 지키는 성도에 대한 그리스도 예수의 위로요 격려입니다.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라는 구문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4,8),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8)는 묘사와 동일한 의미를 가집니다.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주님이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대비하면서 승리의 길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십니다. 세세토록 살아 있는 승리를 얻은 것이 죽음을 통해서였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 면류관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고난 받는 교회 공동체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그동안 몰랐던 고난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또한 사망과 음부도 다스리십니다.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계 20:13-14).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보면 음부에서 부자가 불꽃 가운데 고통당하며 괴로워하였습니다. 음부는 죽은 자들의 영이 거하는 장소로 구약에서 ‘스올’이라 합니다.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주님이 함께 계시기에,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해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마 16:18).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주님을 위해 당하는 고난은 영원토록 승리하는 삶을 위한 영광의 관문인 셈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삶을 사셨습니다. 사도 요한도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랐습니다. 그가 유배된 것이 인간적으로 볼 때 불행일 수 있지만 신앙적으로 볼 때, 그는 고난으로 인해 이 땅의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한 영광스러운 그리스도를 대면하고, 인류 역사에 관한 마지막 계시를 직접 들을 수 있었습니다. 요한이 누리는 엄청난 영광을 감안하면, 그가 밧모 섬에 갇힌 복음을 위한 고난은 견딜 만한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주님 때문에 핍박받지 않았다면 도저히 경험할 수 없었던 영광을 누렸습니다.

주님은 요한에게 세 가지를 기록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입니다. ‘네가 본 것’은 지금 본 환상이고, ‘지금 있는 일’은 현재 교회에 일어나는 일들이고, ‘장차 될 일’은 종말의 시기에 일어날 일,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을 가리킵니다. 마지막으로 20절 전반부는 다음과 같이 번역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내 오른손에서 네가 본 일곱 별과 일곱 금 촛대의 비밀은 이것이다’‘비밀’은 은폐된 것이 드러나는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요한에게 일곱 촛대와 별들이 각각 교회와 그 교회를 지키는 사자라고 합니다. 계시록에서 일곱은 전체를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그러므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는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곱 교회를 주관하시는 이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당시 교회 박해가 얼마나 심했던지 교인들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잊으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이들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한은 환상을 통해 그런 생각이 한낱 기우에 지나지 않음을 확신하였습니다. 주님은 여전히 모든 교회를 주관하시는 분으로 우뚝 서신 것을 환상을 통해 직접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지상의 교회를 지키시는 능력의 예수님, 교회의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 교회와 함께하시는 예수님, 능력의 말씀을 교회에 주시는 예수님, 교회의 사역자들을 굳게 붙드시는 예수님, 복음과 교회의 대적을 물리치고 밟으시는 예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올바른 신앙고백 위에 서 있을 때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요한이 계시를 기록하는 사명을 받은 것같이 성도는 주님이 주신 각자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함으로 주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쓰임 받아야 합니다.

* 우리의 자세
- 믿음으로 든든히 서야 합니다
삶의 어느 구석에도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을 다르게 볼 수 있는 눈을 가질 때 희망이 생깁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희망의 실체가 되시는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보게 될 때 보이는 것이 절망뿐인 환경 속에서도 희망을 갖게 됩니다. 요한에게 환상과 계시가 주어졌다는 것은 새로운 관점을 가지고 현실을 극복하게 하시려는 주님의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현실이 바뀌는 것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난 현실을 믿음의 시선으로 바라봄으로써 이기게 됩니다. 사도행전 3장을 보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거지가 등장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세시 기도시간이 되자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성전을 향하여 올라갑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미문 앞에 쭈그리고 있던 거지에게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장애인 본인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향하여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성전 안에서 날마다 제사가 드려지고 있었지만 사람들에게 치유와 소망을 주지 못하고 그저 종교적인 행사로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성전을 향하여 거지 앞을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셨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영적인 맹인들이었습니다. 사실 베드로와 요한이 미문 앞을 지나가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날 베드로는 자기의 눈앞에서 손을 벌리는 거지에게 하나님께서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거지는 돈을 요구했으나 베드로는 그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동전 한 닢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그를 바라보다가 “우리를 보라”외칩니다. 그리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하면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나면서부터 서본 적도 없던 그 거지가 그 자리에서 힘을 얻고 혼자서 서고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어떻게 하여 그런 dynamic한 역사를 일으킬 수 있었습니까? 주님을 믿음으로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에 힘을 썼기 때문입니다. 약속의 말씀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주님의 시선으로 볼 수 있는 영안을 갖게 되어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요한도 밧모 섬에서 주님만을 의지하며 전혀 기도에 힘을 썼을 것입니다. 약속의 말씀을 붙들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이 세우신 교회를 끝까지 지키고 보존하십니다. 보존하시되 그 입에서 나오는 검, 곧 말씀을 통해 교회를 건강하게 보호하십니다. 우리 또한 믿음에 든든히 서야 합니다.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교회가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성도들은 말씀을 배우고 순종하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끝까지 말씀에 순종하는 교회들에게 궁극적 승리를 주실 것입니다.
- 주님의 위로를 사모해야 합니다
주님에게 우리는 피 값을 지불하고 구속하신 존재들이요 그분의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은 존재입니다. 주님이 주의 백성을 환난 속에서도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증거는 주의 날에 요한에게 찾아오신 주님의 모습 가운데서 발견하게 됩니다. 요한을 기록한 주님의 기사를 읽으면서 초대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을 만나 주실 것을 확신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어떤 환난 속에서도 우리를 만나 주시고 붙잡아 주시는 주님을 바라볼 때, 주님이 걸어가신 그 승리의 길, 초대 교회의 허다한 믿음의 증인이 걸어간 그 이김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들입니다. 비록 힘들고 어려움이 있지만 이 고난의 길을 가야만 합니다. 주님은 미래에 오실 뿐 아니라 현재도 교회와 성도들을 붙잡아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끌어 가십니다. 결론적으로 1장의 메시지는, 믿는 자에게 고난은 있어도 절망은 없다는 계시록 전체의 메시지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삶을 스스로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넉넉히 이기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자신을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진 자’로 소개하셨을 때 당시 성도들은 큰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죽음과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포기하지 말고 담대함을 잃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잠시 어둠이 이긴 것 같으나 결국에는 빛이 승리합니다. 그분의 다스림에 복종하고 그분을 감격 속에 예배하는 것이 그분의 나라가 임할 때 취해야 할 우리의 자세입니다.
-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요한은 성령의 감동 가운데 교회를 지키고 계신 영광스러운 주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본 요한은 죽은 자같이 될 만큼 압도되어 엎드렸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위로하시며 그가 본 것, 지금 있는 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가 받은 은혜를 편지로 써서 지금 낙심과 절망 가운데 있는 교회들에게 보내어 새 힘을 주시길 원하셨습니다. 박해 가운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요한이 만난 예수님의 모습은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영광을 입은 위엄 있는 통치자와 같은 예수님의 모습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주관하시며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임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계시를 기록하는 사명을 받은 것같이 우리는 주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사명을 충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사명은 자신이 원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각자에게 부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명도 예수님이 영광과 존귀를 입으시고 우리 곁에 살아 계심을 확신하며, 고난 중에도 목숨 다해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려면 우리가 먼저 그 예수님의 복음으로 인해 감격이 넘치는 삶, 열정이 회복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복음이 생명력 있게 증거됩니다. 지금은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바로 깨닫고 그 사명을 위해 죽도록 충성할 때입니다. 지금은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우리 안에서 회복되도록 기도할 때입니다.

나가면서
계시록은 한마디로 환난을 당한 요한이 비슷한 고난에 당하고 있는 독자들에게 자신처럼 환난을 당하더라도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라고 권면합니다. 사실 고난을 먼저 겪으신 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성도가 받는 고난은 궁극적으로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해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길을 걷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고난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표증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위해 능욕 받은 것을 기뻐했습니다(행 5:41). 예수 그리스도를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당하는 것도 또한 값진 일입니다.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은 당신을 위해 고난 받는 성도들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미래의 종말론적 구원을 예비하실 뿐만 아니라 현재 고난 중에 있는 당신의 백성을 돌보십니다. 사도 요한이 유배된 밧모 섬에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망망한 고도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것입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찬송가의 가사와 같이 임마누엘의 주님을 경험하며 성도들의 삶의 현장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현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인생의 겨울을 지나고 있다 하더라도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택하신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을 가지고 주님을 믿음으로 의지하고 주님의 위로를 사모하며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인내하며 기쁨으로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