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메시아를 기다린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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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25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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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눅 2:25-38


신앙생활에서도 기다림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입니다. 기도의 응답도, 약속의 성취도, 하나님의 역사도 기다림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기다림에 대한 구절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 42:1). 시인은 하나님을 자유롭게 예배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갈급해하는 자기의 모습을 시냇물을 갈급히 찾아 헤매는 목마른 사슴에 비유합니다.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숫군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시 130:6). 남들이 자는 시간에 자지 못하고 깨어서 망을 보아야하는 파숫군이 아침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듯이 시인은 그 파숫군의 기다림 이상으로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린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성도들은 열흘 동안 기도에 힘쓰며 기다리다가 약속한 성령을 받고 복음 전파에 힘썼습니다. 반면에 기다리지 못하여 낭패를 당한 사람들도 성경에 나옵니다. 사무엘상 13장을 보면 길갈에서 이스라엘 군대가 블레셋 군대와 대치하고 있을 때 사무엘이 일주일 만에 오겠다고 했는데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블레셋을 두려워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꾸 흩어지니 사울이 다급한 마음에 제사장만이 드리는 번제를 대신 드리다가 사무엘로부터 망령되게 행동했다는 책망을 들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의 촛대가 사울에게서 다윗으로 옮겨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메시아의 오심을 갈망하며 오랜 세월을 기다려 왔습니다. 무슨 근거로 그럽니까?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삼하 7:12-13). 하나님이 선지자 나단을 통하여 다윗 왕에게 주신 약속에 근거합니다. 이스라엘이 신앙적으로 타락했을 때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심판과 회복의 메시지를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나단의 예언이 종말에 이루어질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유대교의 메시아사상이 나왔습니다. 그들은 다윗 왕조를 재건할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의 부모가 정결 예식과 아이의 대속 제사를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왔을 때 시므온과 안나를 만납니다. 두 사람은 이곳 외에는 전혀 성경에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아기 예수님의 사명과 정체성을 증언하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이들과 관련된 사건은 예수님의 탄생 기사의 마지막 부분을 차지하면서 이제까지 나왔던 이야기의 신빙성과 권위를 확증하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과 그들이 만난 장소가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지인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점도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통한 만민의 구원은 이스라엘에게 주신 예언과 율법의 성취이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은 오랜 기다림 끝에 예수님을 성전에서 만났습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도 믿음으로 기다릴 줄 아는 사람들이 되어 시므온과 안나와 같이 하나님의 풍성한 위로와 사랑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시므온(25-27절)
누가가 예루살렘에 사는 한 사람을 소개하는데,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시므온입니다. 시므온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누가는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성령’이라는 단어가 세 번, 각 절마다 반복됩니다.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에서 ‘계시더라’는 미완료 시제인데, 동작의 반복이나 진행의 의미를 갖습니다. 성령께서 시므온 위에 계속해서 머물러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한 신앙과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종말론적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의롭다’는 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짐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을 말합니다. 누가는 ‘의롭다’라는 단어를 사가랴와 엘리사벳(1:6), 십자가의 예수님(23:47), 공회 의원인 요셉(23:50)에게 사용했습니다. 누가의 글에서 ‘의롭다’는 ‘율법을 잘 지킨다’는 뜻을 가집니다(1:6). 시므온은 ‘경건한’사람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애서 오직 누가만 사용한 단어로, 이 또한 율법에 따라 사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는 또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사람입니다. ‘위로’로 번역된 단어는 이스라엘과 관련된 문맥상 이스라엘의 독립 또는 회복을 의미합니다. 곧 하나님이 메시아를 보내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소망을 가졌습니다.

모세가 명한 율법에 의하면 남자아이는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행하고 40일이 지나면 예루살렘 성전에 데리고 가서 제사를 드려야만 했습니다(레 12장). 그래서 예수님의 부모는 율법의 명령에 따라 정결 예식을 행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갑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날마다 제사가 드려지기는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그 성전의 주인은 계시지 않았기에 빈집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성전 주인이 나타납니다. 마침 시므온도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성전에 들어갑니다. 성전에는 성소와 지성소의 바깥쪽에 이스라엘의 뜰, 여인들의 뜰, 이방인의 뜰이 있습니다. 시므온이 예수님의 가족을 만난 곳은 아마 이방인의 뜰이나 여인들의 뜰이었을 것입니다. 시므온이 성경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갔기에 아기 예수님을 보는 순간 아기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단번에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시므온의 찬송(28-33절)
주님의 구원을 본 자는 마땅히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시므온은 육신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메시아를 품에 안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안다’라는 동사는 앞에서 시므온에 대해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묘사할 때 사용된 ‘기다린다’동사와 같은 어근을 가집니다. 그는 아기 예수님을 ‘받음으로써’이스라엘의 위로를 ‘받아들인’것입니다. 시므온의 찬송은 평생을 기다리던 메시아를 만난 기쁨의 찬송이자, 이제 곧 맞이할 죽음을 준비하는 마지막 찬송이기도 합니다. 성령의 사람으로 주님의 뜻을 기다리며 살아갈 때, 우리에게도 특별한 만남과 아름다운 사건들이 펼쳐질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된 찬송이 여러 편 나옵니다. 엘리자베스의 찬송(1:42-45), 마리아의 찬송(1:46-55), 사가랴의 찬송(1:68-79), 천사들의 찬송(2:14)입니다. 시므온도 찬송을 부릅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시므온이 부른 찬송은 ‘이제는 놓아 주시는도다(Nunc dimitis)’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라고 천사들이 찬송을 했는데 시므온은 그 ‘평화’를 직접 체험하였습니다. 시므온은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지칭하고, 하나님을 ‘주재’라고 부릅니다. ‘주재’는 절대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놓아 주심’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시므온은 삶과 죽음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이제 자신을 놓아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그는 전에 ‘메시아를 대면할 때까지 죽지 않으리라’는 성령의 나타냄을 받았었습니다. 그때가 이제 찾아온 것입니다. 시므온은 마지막이 가까웠음을 시인합니다. 구원의 시대가 왔고 하나님의 위로를 보았기에 이제는 평안하게 눈을 감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시므온은 감사 찬송의 근거를 제시합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가 있습니다. 시므온은 자신의 눈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기 때문에 감사 찬송을 드린 것입니다. ‘주의 구원’은 사가랴가 예언했던 구원의 성취로서 아기 예수님을 가리킵니다(1:69,71). 이는 천사가 목자들에게 선포한 예수님의 메시아 신분을 확증합니다. ‘만민’, ‘이방’이라는 단어는 구원의 범위가 이스라엘로만 한정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이 배제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주의 백성’이며,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영광이 되십니다. 다만 이스라엘만을 위한 구원이 아니라 만민에게도 구원을 가져올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시므온은 자신의 눈으로 아기 예수, 곧 주의 구원을 보면서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라고 찬송합니다. 그런데 ‘빛’을 뜻하는 단어는 주격이고, ‘영광’을 뜻하는 단어는 목적격입니다. 이 문장을 직역하면 ‘빛이 이방을 비추며 또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을 비춘다’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스라엘에게만이 아니라 만민 앞에 예비된 것이고, 이방을 비추는 빛의 역할을 이스라엘이 감당하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우실 새 이스라엘, 교회는 유대인만이 아니라 온 세상 만민이 속할 수 있는 모임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성탄절은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우리만 누릴 것이 아니라 이웃들과 여러 미전도 종족에게까지 전해야 함을 기억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목자들이 와서 ‘구원자가 다윗의 동네에서 나셨다’는 천사의 말을 전했을 때 놀랐습니다. 특히 마리아는 그들의 말을 마음에 두고 곰곰이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시므온의 찬양을 듣고 또 놀랍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이 아이를 통하여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시므온의 예언(34-35절)
시므온은 예수님의 부모를 축복하고, 마리아에게는 아기 예수님의 장래에 대해 두 가지 예언을 합니다. 첫째, 유대인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두 가지 대조적인 반응을 보인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 중 많은 사람을 패하기도 하고 흥하게도 할 것이라고 합니다. ‘패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교만한 자들의 멸망을 의미합니다. 반면 ‘흥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겸손한 자들에게 구원이 임한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구원을 이루셨지만 그렇다고 누구나 구원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를 영접하는 자들에게 죄 사함이 있고 구원의 은혜와 영생의 선물이 주어집니다. 반면에 이 크신 사랑에 응답하지 못하고 주님을 배척하거나 무관심한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 둘째, 예수님은 비방 받는 표적이 되실 것입니다. 이 표현은 ‘거부당하는 표증’으로 직역할 수 있으며,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을 통해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의 죄성을 입증하심을 가리킵니다.

이어서 시므온은 마리아에게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으로 인해 마리아에게 임할 고통을 말한 것입니다. 아들의 고난은 어머니의 슬픔이기에 마리아는 칼이 마음을 찌르는 듯한 극한 아픔을 겪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시리라고 합니다. 십자가는 구원의 빛이기에 그 앞에 서면 우리의 모든 존재가 밝히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로마로부터 유다를 구원할 정치적 메시아도, 무조건 유대인들을 편드는 구원자도 아닙니다. 오직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을 흥하게 하시고, 그렇지 않은 자들의 죄는 드러내실 분입니다. 이는 거룩하게 살지 않으면서 ‘나는 모태신앙이니까 세례를 받았으니까, 나는 교회를 다니고 있으니까 하나님의 자녀다’라며 자긍하는 자들을 향한 경고입니다. 성탄절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왔는지 돌아보고 반성하는 날이어야 합니다.

아기 예수님을 만나는 안나(36-38절)
그날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난 또 다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탄생의 마지막 증인으로 '은혜'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안나가 등장합니다. 시므온에 대해서는 의롭고 경건한 성품이 언급되었던 것과 달리, 안나에 대해서는 그녀의 인적사항이 소개됩니다. 첫째, 안나는 선지자였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백성에게 전하는 자입니다(신 34:10). 안나가 당시 유대인들에게 선지자로 간주되었거나, 누가의 관점에서 볼 때 안나가 초기 교회에서 예언 은사를 받은 자들과 유사했기에 그렇게 불렸을 수 있습니다. 둘째, 안나는 아셀 지파에 속했습니다. 아셀 지파는 북 왕국을 구성했던 열 지파 중 하나였는데, 예수님 당시는 존재조차 희미한 잊힌 지파가 되었습니다. 유다 지파가 아닌 안나가 어떻게 남쪽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이주하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다 지파 뿐 아니라 온 이스라엘을 위로하기 원하였습니다. 셋째, 안나는 나이가 매우 많았습니다. 결혼한 지 7년 만에 남편을 잃었습니다. 개역 성경에는 “과부된 지 84년이 지났다”고 하고 개역개정판에는 󈭄세에 이르기까지 과부로 있었다”고 하는데 둘 다 문법적으로 맞습니다. 󈦴년’은 그녀가 과부로 지난 기간일 수도 있고, 그녀의 나이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이든 나이 많아 늙은 것은 분명합니다. 당시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편을 잃은 과부는 사회에서 약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인들이 할 수 있는 경제 활동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생계를 꾸려가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머리털은 백발이 되고, 얼굴에 깊은 골이 패인 늙은 과부를 주목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넷째, 안나는 성전에 머물면서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하며 섬겼습니다. 고난을 당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안나는 일찍 과부가 되어 평생을 홀로 살았지만 자신의 불행한 과거에 매이거나 좌절하지 않고 오직 성전에서 기도하며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날도 안나는 평소처럼 하나님께 감사하러 성전에 나아왔을 것입니다. 그때 평생을 기다린 메시아를 만납니다. “마침 이때에”라고 표현하지만, 안나와 아기 예수님의 만남은 우연한 만남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우연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안나를 위로하기 위하여 안나로 하여금 아기 예수님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오랜 간구와 기다림 끝에 죄인들을 속량하실 메시아를 만난 것입니다. 안나도 시므온처럼 성전 여인들의 뜰이나 이방인의 뜰에서 만났을 것입니다. 안나는 자신의 오랜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자신과 같이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전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속량’은 시므온이 말한‘이스라엘의 위로’와 같은 맥락입니다. 구약성경의 정황에서 이스라엘의 속량과 위로는 이방 민족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이스라엘이 압제로부터 해방되는 것으로 실현됩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통한 속량과 위로는 죄와 질병, 악한 영의 속박, 그리고 좀 더 현실적으로 체감되는 정치, 사회, 경제적 모순과 억압을 포괄하는 인간 전 존재의 차원에서 임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또한 혈통적, 민족적 정체성이 아니라 신앙적, 영적 정체성을 뜻합니다.

* 성탄절을 어떤 자세로 맞이해야 할까요?
- 성령 충만함을 사모해야 합니다
시므온이나 안나는 쇠잔해 가는 육체, 벗들과의 사별, 소외감과 궁핍을 경험하면서 메시아를 기다리는 단조로운 삶을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는 것은 메시아를 만난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더불어 필요한 요소가 ‘인내’입니다. 아무런 조짐이 보이지 않더라도 믿는 바가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리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인내는 우리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인내는 성령의 열매입니다(갈 5:22). 지금까지 탄생 기사에서 여러 차례 나타났듯이 본문에도 성령의 강력한 임재와 활동이 언급됩니다. 시므온이나 안나의 두 사람은 꽤 나이가 많았는데도 성령으로 충만했고 지혜와 분별력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강보에 싸인 어린 아기의 모습이셨는데도, 예수님을 바로 알아보고 경배했습니다. 우리도 시므온과 안나와 같은 영적인 안목과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그들이 보여준 삶의 여정은 믿는 노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아름다운 길이었습니다. 나이가 많기에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거나 자식이나 손자들의 눈치만 보며 살 것이 아닙니다. 또한 지난 과거만을 되뇌며 인생을 마감할 때를 기다리고만 있어서도 안 됩니다. 주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시므온이나 안나가 가졌던 영적인 안목은 꾸준한 말씀생활과 기도생활을 통하여 얻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성령의 이끄심에 민감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이 시키는 대로 순종하며 귀한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시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의 비전을 따라 살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시므온은 제사장도 아니요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영적으로 탁월한 경건함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성령에 의해 메시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 하리라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이 그의 비전이 되었습니다. 그 비전 때문에 시므온의 기다림은 더욱더 간절하게 되었고 또 그의 경건과 의로움은 더욱 깊어질 수 있었습니다. 시므온과 안나는 예수님을 단 한 번 만났지만 그동안 기다린 것이 전혀 후회스럽지 않을 만한 만족과 기쁨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강렬한 만남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주님과의 만남은 모든 것을 보상받을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주님과 만나고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은혜를 경험하셨다면, 그것을 나누어야 합니다. 2023년 새해에도 주님이 주시는 비전을 가지고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며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비전을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대로 이웃을 향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위로를 전해야 합니다.
- 아름다운 마무리 짓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것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귀한 것으로 충만히 채워지니 세상에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습니다. 성도는 자신 안에 영생이 있음과 또 죽음 저 너머 편에 영원한 안식의 나라가 기다리고 있음을 주 안에서 확신합니다. 바울은 ‘만일 땅에 있는 장막집이 무너지면 ...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을'(고후 5:1) 안다고 했습니다. 선교의 사명만 아니라면 어서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 이것이 더욱 좋다’(빌 1:23)고 했습니다. 성도들에게 죽음은 영원한 본향으로 가는 통로가 됩니다.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다가 시므온처럼 주님이 부르실 때 미련 없이 삶을 마무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합니다. 우리 교회에도 연로하신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비록 나이가 많이 들어 늙었을지라도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고 신앙의 진액이 이전보다 더하며 믿음의 빛이 더욱 빛나는 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때까지 의롭고 경건하여 자손과 젊은이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뿌리를 그리스도 안에 깊이 박고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거룩함을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모든 성도들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마지막까지 믿음을 지키고, 예비된 의의 면류관을 바라보면서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생애를 아름답게 마무리 지으며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의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나가면서
믿음의 본질은 선포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만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기독교가 편협하다고 주장을 하지만 그런 공격을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구원은 양보할 수 없고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예수님을 만나야 비로소 의미가 있습니다. 그동안 내가 나의 삶의 주인이 되어 살았다면 회개하며 이제부터 예수님을 주님이요 구세주로 영접하시고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어 주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아직 주변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 어머니 내 아버지 내 사랑하는 자식이 내 사랑하는 친구가 예수를 영접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타는 것 같아 견딜 수 없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시므온과 안나가 예수님을 만났듯이 이번 성탄절에 예수님을 만나는 복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2000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에 분명히 오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천사장의 호령과 나팔소리로 더불어 분명히 다시 오십니다. 주님의 초림을 기념하는 성탄절에 기도와 묵상과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하시고, 아기 예수님을 안은 시므온과 같이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시고 안나와 같이 주님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소망 중에 기다리면서 때마다 시마다 하나님의 것으로 풍성하게 채움 받으시기를 바랍니다.